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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덕.jpg 젊은 시절, 충동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린 덕분에 평생 큰 덕을 보는 경우가 있다. 20세기 초반 일본 정재계를 주름잡던 다까하시 고레끼요의 미국유학이 그랬고 나의 해병 입대도 마찬가지다.
다까하시는 선교사의 말만 믿고 덜컥 도미유학길에 올랐다가 사실상 노예생활자가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길을 뚫고 공부를 마친 다음 귀국해서 대장상(재무장관)만도 세 번이나 하고 총리대신까지 역임한다.
도미유학이 모든 행운의 밑천이었다.


나의 해병입대도 전형적인 덜컥수였다. 대학 1학년을 마친 다음 등록금이 없었다. 그냥 노느니 군대나 때우자고 생각했고 기왕 군대생활하는 것, 남들이 힘들다고 하는 해병대에나 가볼까... 했는데, 공교롭게도 종로4가에서 해병 신병모집 광고를 본 게 동기의 전부였다. 신병훈련소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빠따라는 게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다까하시의 경우는 도미유학이 노예생활로 이어졌지만 나의 경우는 무수한 빠따로 점철되었다. 훈련소에 들어가자마자 키 큰 값을 하노라고 향도로 뽑혔다. 소대원들 기죽이고 군기 잡기 위해서 향도가 대표로 빠따를 맞아야 한다는 상식 중의 상식도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 실책이었다. 첫 3주일은 엎드려서 자야만 했다.
신병훈련을 마친 다음? 늑대 굴을 지나서 만세를 부르다 보니까 사자굴인 격이었다. 해병대 하고도 사령부 의장대로 뽑혀간 것이다. 서울대 출신 사병1호에게 대검 꽂은 M1 소총을 공깃돌 가지고 놀 듯 하라는 명령인데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 싶겠지만....가능했다. 해병대니까 가능했다. 다른 데라면 안됐겠지만 해병대에서는 가능했다.


귀국 이후 다까하시가 해낸 그럴듯한 업적들이 미국유학에서 얻은 지식과 관련있듯이 제대 이후 내가 『해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은 해병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결혼만 해도 그렇다. 장모님의 반대가 소설에나 나올 법할 정도로 격렬했다. 단칸 셋방에 사는 7남매의 맏이에게 8백평 저택에 사는 마나님이 딸을 내주는 게 너무도 억울했던 것이다. 나의 해결방안은 해병대식이었다. 장인이 애지중지하는 대형 온실을 절반만 박살내었는데도 효과만점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나머지 절반을 남겨둔 처사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장인이 나의 자제력을 높이 평가해줬기 때문이다.
선거를 치르거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해병정신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용기와 결단력을 공급했다.


돈 없으면 선거운동이 안 되던 시절 거의 맨주먹으로 정면 돌파를 해낸 것도 해병정신이었고, 양 김씨가 영호남을 갈라서 싸울 때 거기에 가담하지 않은 것 역시 해병정신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까하시가 후배들에게 미국 유학을 권했듯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해병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내가 해병대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울대 외교학과 동기생 4명이 줄이어 입대했는데, 이 가운데 나를 원망하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물론(그 시절에는 워낙 많이 얻어맞았으니까) 꽤 오랫동안 고맙다고 하는 놈도 없었다.


해병정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얘기 한 토막을 덧붙이고 끝내려 한다. 내가 진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1백30기 동기생 3명에 대한 얘기다. 입대 동기생일 뿐더러 사령부 의장대에서도 함께 뒹굴었던 소중한 친구들이 해병정신으로 일구어낸 일들에 대해서다.
박춘만·한상규·김진수 세 사람은 제대한 뒤 발붙일 데가 없었다. 기술도 없었다. 총 돌리는 기술은 적어도 밥벌이에는 소용이 닿지가 않았다. 돈은 더욱 철저하게 없었다.
셋은 을지로5가의 중부시장으로 갔다. 청과류 도소매상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일 큰 상점에 찾아가서 외상으로 과일과 채소를 주면 팔아서 갚겠다고 교섭했다. 주인이 물었다. 떼이는 셈치고 주기는 하겠지만 리어카나 좌판은 준비되었느냐고.
길에서 신문지를 깔고 팔기 시작했고 잠은 상인들의 리어카 위에서 잤다. 노숙하는 노점상이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친구 셋은 얼마 후 리어카를 샀고 다시 얼마 후 좌판을 샀고 한참 후 내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는 중부시장에서 제일 큰 청과상회 주인이 되어 있었다. 아 참, 3기 후배인 1백33기의 유근상이도 여기에 가세했었다.


내 친구들이 일구어낸 일을 「해병정신」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중부시장 상인들이 내 친구들에게 보냈던 한없는 신뢰를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리어카를 막 사게 됐을 무렵 중부시장에서 기생하던 조폭들을 목숨 걸고 소탕했던 때부터 변함없이 받아온 신뢰였다.
한상규만 남고 두 친구가 세상을 뜨면서 해병사령부 의장대동우회 사무실 노릇까지 하던 청운상회도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해병정신의 살아있는 증거였던 세 동기생들의 일을 너무나도 자랑하고 싶다.


이 글을 쓰기 전 한상규에게 자기들의 얘기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에 사는 김진수의 부인에게는 안부인사만 하고 어물쩡 말을 돌려버렸다.
이 글은 해병 가족도 읽겠지만 예비해병 가족들도 꼭 좀 읽어줬으면 한다. 젊은 시절 해병생활을 하고 해병정신을 몸에 지니는 것이 얼마나 삶에 보탬이 되는지를 일깨워주고 싶어서다. 설령 입대의 동기가 『현빈』 때문이라도 상관없다. 나 역시 『등록금이 없어서』였으나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해병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가. <해병대지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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