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소령 공관 경비대장

-한동성 대위 33헌병대 중대장

-김정호 중장 해군제2참모차장(제13대 해병대 사령관)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일본제 수퍼싸롱 승용차 두 대(우경윤 대령, 허삼수 대령 및 수사관 3명)가 정문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 후 통과시켰고, 19:10경 육군헌병 백차 1대가 25인승 마이크로버스 2대(병력 61명)를 컨보이 하여 육군공관 근무교대차 통과하겠다는 요청을 받고 사전 연락 없이 많은 병력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차 전화를 하는 순간 마이크로버스에 승차했던 육군 헌병 9명이 급습하여 정문근무헌병 3명을 포박하여 정문 위병소 건물안에 감금하고 정문 위병소를 장악한 뒤 위 버스등은 공관안으로 들어가 육군총장 공관으로 향하였다.

 

1. 황인주 소령, 공관경비대장의 진술

 

외곽초소 순찰도중 19:20경 참모총장공관쪽에서 총성 4~5발이 들려 단순오발이 아닌 어떤사고로 생각하고 즉시 인근초소로 띄어가 경비대에 전화를 하여 기동타격대 비상을 걸고 곧장 경비대 막사로 달려갔다.

 

경비대에 도착하여 탄약고에 보관중인 실탄을 꺼내 기동타격대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지시하고 내무반에서 무장을 하던중 반일부 준위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뛰어와 괴한이 출현했다 소리침으로 제가 무엇이냐고 돌아보는 순간 반 준위를 뒤따라온 육군 수경사 소속 33헌병단 병력이 총을 쏘면서 경비대안으로 들어와

저와 반 준위가 그들에게 붙잡혀 제 사무실에서 그들에 의해 원상폭격 등 기합을 받고 있을때, 경비대밖에서 실탄을 지급받던 기동타격대원들이 이를보고 대장이 인질이 되었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실탄을 장전하고 흩어져 경비대 선임하사의 지휘에 따라 경비대옆 삼거리를 장악하고

이어 19:30경 정문을 장악하고 잇는 헌병들에게 쳐들어가 육군헌병을 포박하고 정문을 탈환하였는데(이때 육군헌병 3명 부상) 이 과정에서 총성이 울리자 저를 붙잡고 있던 육군차명불상 대위가 총을 못쏘게 할 수 없느냐고하여 나를 내보내주면 쏘지 않토록하겠다 하니 자기도 같이 가자고 하기에 당신은 여기에 그냥 있어아 내 부하들이 당신을 보면 죽일지 모른다고 하니 저를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때가 17:40경인데 제가 삼거리쪽으로 가 미리 준비되어 있던 모래주머니로 임시진지를 구축하여 부하들을 배치시키고(이때 전부터 육군참모총장공관에서의 총성을 듣고 나와있던 해군제2참모차장인 김정호 중장을 진지안으로 모셨음)

 

그후 2.:00경 육참공관에 갔다가 철수하기위해 삼거리쪽으로 나오는 육군헌병 27명이 승차한 마이크로버스 1대를 붙잡아 전원 무장해제 시키고 이어 20:40경 저희 경비대를 쳐들어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육군헌병 25명을 역시 무장해제 시킨 다음 정문으로 가니 육군헌병 대위 1명, 사병 2명이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었고

육군본부 헌병감실 기획과장인 성환옥 대령이 걸어서 정문을 나가다 제 부하 정문근무자에게 붙잡혀 원산폭격등 기합을 받고 있기에 제가 말렸으며 그때 육군본부 본부사령인 황관영 준장이 어디서 연락을 받았는지 들어오는 것을 제가 그분은 전부터 알고 있으므로 안내를 하여 위 성 대령과 함께 김정호 장군에게 데려갔고 이어 김 장군 공관으로 같이 갔다.



 

그곳에서 국방부장관 공관앞에서 무장해제된 인원중 사복차림인 3명이 있다고 보고하자 그들도 데려오라고하여 위 공관으로 데려가 신원을 확인하니 보안사 준위들이었다. 그들에게 김 장군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황 장군은 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성 대령과 보안사 준위 3명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라고 하였다.

위 황 장군등은 다시 김정호 장군 공관으로 가 있었고 저는 21:00경 제 부하들을 전원 소집한바 국방장관 공관에서 동초를 보던 1명이 없어 찾았는데 그 병사가 10분쯤 뒤에 나타나기에 그 연유를 물어보니 노재현국방장관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혼자나와 단국대 담을 넘어 가는 것을 안내하고 왔다고 하였다.

 

이후 계속 대치 상태로 있었는데 다음날 06:00경 국방부차관이 김정호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무장해제된 군인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하여 06:32경 전원 풀어주었습니다.

(이하 생략)

 

 

2. 한동성 대위 33헌병대 중대장 진술

 

12. 12. 10:40경 33헌병대장인 최석립 중령이 저와 다른 중대장을 불러 오늘 오후에 임무수행이 있으니 병사들에게 저녁식사를 일찍시켜달라고 지시하여 그날 16:00경 저녁식사를 마치고 있으니 16:30에 출동지시가 내려져 마이크로 버스 2대에 제대별로 저의 제대 27명을 한 차에 그리고 모 대위의 제대원들을 다른 한 차에 탑승시키고 대기하고 잇으니 17:00경 최 중령이 자기 뒤를 따라오라며 짚차를 타고 선도하여 따라가보니 보안사 서빙고분실이였습니다.

(중략)

그리고, 얼마뒤 최 중령 짚차 뒤를 따라 한남동 공관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략)

공관지역 정문 못미쳐 한남체인 슈퍼앞 공터에서 탑승대기 중이었는데 무전으로 이동지시가 내려와서 정문초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정문초소에 이르니 이미 최 중령이 정문을 장악하고 저희들에게 정문을 열어주어 문이 열리는 순간이어서 정문에서 쉬지않고 그대로 진입하여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올라갔습니다. 공관에 도착하여 공관초소 밖에 정차시키고 하차한뒤 공관 마당에 엎드린 자세로 배치시키고 저만 현관 밖 10미터 지점에서 현관안을 쳐다보니 마침 정 총장이 허삼수와 성명불상의 1인에 의해 양쪽으로 찰을 낀채 밖으로 끌려나오며 실갱이를 하고 있다가 저희들을 보더니 쏘지마라고 소리를 쳐 제가 다시 저의 부하들에게 절대 사격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정 총장이 2사람에 의해 끌려나와 현관밖에 대기중인 승용차에 태워져 끌고 나온 사람들과 함께 공관 밖으로 나갔고 그 후 현관 안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현관에 가보니 현관 입구 신발 벗는 곳에 한번 보아 안면이 있는 우경윤 대령이 가로로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어 저의 부하들을 시켜 들고 나오니 마침 승용차가 1대 더 있어 그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할 사람을 찾으니 그 차 앞에 민간인 복장을 입은 성명불상자(합수부 수사관)가 있어 부하 1명을 탑승시켜 운전하여 가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중략)

특별한 상황이 없어 철수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문초소 쪽에서 총성이 간간히 여러발 들려서 철수하기 위해 나가다 위병소를 보니 헌병 대령 한 명이 위병소 안에 서있어 들어가 보니 성환옥 대령이어서 철수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나도 모르겠다. 명령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하여 그 안에 있는 헌병 내무반으로 들어가보니 헌병중령 1인과 보안사 수사관 2명과 육본헌병 10여명이 있어 제가 육본헌병들에게 밖에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라 별일 없다는 취지로 이야기를 하고 밖으로 나와 조금 대기하고 있다가 더 이상 잇을 필요가 없어 철수하기로 마음먹고 부하들을 버스에 탑승토록 하였는데 그때 성 대령과 합수부 수사관 2명도 같이 탑승하였습니다.

이어 도로를 따라 나오는데 정문초소쪽으로 꺽어지는 지점에 이르고 보니 해병대원 3~4명이 서서 M-16소총을 겨누며 정차신호를 하여 즉시 정차시켰습니다. 그 상황에서 서로 총을 쏘면 커다란 불상사가 생길것 같아 제가 먼저 해병대 책임자로 보이는 어느 소령(황인주 소령추정)에게 우리 서로 내막을 모르니 날 샐때까지 기다려보고 총을 쏘지 말자고 제의하였고 그 소령도 동의하였습니다.

얼마후 해병대 경비대장인 소령이 다시 오더니 해병대 막사로 진입한 모 대위 등이 해병대원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다면서 풀어주도록 해달라고 하여 제가 무전으로 풀어주라고 이야기 하니 모 대위는 제가 그들에게 협박을 당하여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을 듣지 않다가 제가 계속 독촉을 하니 결국은 풀어주고 그곳에서도 무장해제를 하였습니다.

 

그뒤 해군 제2참모차장인 김정호장군이 지휘자가 누구냐며 자기하고 같이 있자고 하여 제가 무장을 풀고 성 대령과 같이 내려가니 저와 성 대령을 손을 뒤로하여 포박한 후 돌담을 보고 세워 놓더군요. 그러다 얼마후 저희들을 정문초소로 데려가 초소밖에 꿇어 앉혀 놓았는데 초소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일어나서 초소안을 들려다보니 저의 헌병대원들이 포개져서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문초소 탈환작전시 부상을 당한 것으로 판단하고 마침 그곳에 와있던 해군본부 헌병대장인 어느 중령에게 위 부산ㅇ자들을 후송시켜달라고 요청하여 후송시켰고 그 얼마후 김정호 장군으로부터 그 공관으로 안내하여 오라는 지시가 내려져 포박을 풀고 공관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이 되어 서빙고분실로 돌아갔다가 원대복귀하였습니다.



(중략)

제가 어제 해병대 막사에 갔었던 모 대위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이 해병대 막사로 진입하여 가니 해병대원들이 이미 비상이 발령되어 총과 탄통을 들고 뛰어나가며 배치중이었던 상황에서 미루어 짐작하면 저희들이 진입하기 이전에 총성이 나서 비상이 발령되어있던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하 생략)    

 

 

3. 김정호 중장 해군제2참모차장의 회고

 

19시 20분경 육군참모총장 공관 쪽에서 4~5발의 총성이 들렸으므로 공관 지역에 긴급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공관 거실에서 그날 청룡부대 초도순시를 마치고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총성을 듣고 김신조 부대와 같은 괴한들이 공관 지역에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급히 무장을 하고 공관 정문을 나서 삼거리의 경비대 쪽으로 달려가는데, 부관 송문현 중위(미국 샌디에고 주립대학 교수)와 신창득 해병(한국토지공사 기획실장)이 내 뒤를 수행하였고 막사 쪽에서 달려오는 세 명의 경비병이 나를 몸으로 호위하면서 "사령관님 육군 헌병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대장 이하 많은 병력이 체포되어 연행되었습니다." "오늘 육군하고 한바탕 합시다."라는 말을 듣고 그 순간 판단으로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지지 세력이 습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막사 앞 삼거리에 이르니 10여 명의 대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기에 "나 사령관인데 지금부터 직접 지휘하겠다."고 선포한 후 "누구든지 우리의 수하에 응하지 않으면 발사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19시 10분경 육군총장 공관 지역으로 진입한 마이크로버스 2대 중 1대에 탑승한 헌병 병력은 총장 연행을 지원하였고, 다른 한 대의 버스에 탑승한 병력은 막사 지역으로 이동하여 막사를 기습하였다.

이때 공관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은 초소를 순찰중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성 4~5발의 총소리를 듣고 급히 귀대하여 비상을 발령하고 기동타격대 20명의 병력에게 상황실 앞에서 실탄 분배중 육군헌병의 기습을 받아 체포 연행되어 막사 내에 구금되었고, 다른 대원들도 체포되었으나, 십여 명의 병력은 현장을 탈출하여 삼거리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본인이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 병력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누군가가 "사령관님 정문을 육군헌병이 장악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하기에 정문초소를 특공조로 공격토록 지시하니 그곳에 탈출하여 있는 경비 선임부사관 김명환 중사가 4명의 특공조를 편성 정문에 이르는 도로가의 배수로를 따라 포복하여 정문초소에 접근 일제사격하며 돌격하여 탈환 점령하였고, 포박되어 있는 3명의 해병헌병들을 풀어 주고, 육군헌병들을 체포, 포박하였으며, 9명 중 3명이 부상하였고, 사망자는 발생되지 않았다.

이때 마이크로버스 1대가 국방장관 공관 앞을 통과하므로 초병이 나서서 정지시킴과 동시에 길 양쪽으로 병력을 배치 차 안에 타고 있는 육군헌병 전원을 무장해제시켜 그들 모두를 차 안에 연금조치하였다.

그 무렵 막사에 감금되어 있던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이 탈출하여 왔기에 경비대 병력을 지휘하게 하였다. 경비대장에게 막사 탈환을 지시하여 이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고, 병력을 막사 주변에 배치하고 압수한 육군헌병의 무전기를 이용 해병헌병에게 포위됐으니 항복하라고 설득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차 속에 체포되어 있는 육군 헌병중대장(한성동 대위)을 시켜 설득하였던바 헌병 중대장의 설득으로 모두 투항하였으므로 무장 해제하고 구금하였다.

 

일단 긴급한 사항이 수습되었으므로 상황 보고는 우선 국방장관에게 해야 되었기에 장관 공관으로 경비대장을 대동하고 공관에 도착하니 부관이 말하기를 장관께서 공관을 출발하여 산에 있는 경비초소 쪽으로 갔다기에 급히 뒷산 쪽의 경비초소를 갔으나, 장관은 초병의 도움을 받아 울타리를 넘어 단국대 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우리 해병 경비대는 정문초소를 탈환한 후 정문을 폐쇄하였고, 정문에 접근하는 부대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초소에서는 위협사격으로서, 정문을 방어하여 여러 접근부대를 차단하였다. 초소를 떠나 삼거리 지역에 되돌아왔을 때 정문으로부터 헌병감 박종근 장군이 해군 5분대기조와 함께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있기에 들여보내도록 지시하고 정문초소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정문 가까이에서 박 장군을 만났는데 밖에는 육군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이 육본 5분대기조를 지휘하여 도착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하였다. 신원확인이 가능하고 상황파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 황 장군 일행을 들어오도록 조치하였다.

 

정문 근처 도로상에서 이들을 만나 상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차 속에 체포하고 있던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헌병중대장 한 대위를 불러와 대면을 시켰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와 언동이 수상하고 성 대령이 황 장군과 밀담을 나누는 태도가 수상하여 가까이 있는 황 장군에 일격을 하면서 대화를 중단시키고 성 대령과 한 대위를 체포 포박하여 초소에 구금하였다. 그후 헌병감 박 장군과 육군 본부사령 황 장군을 따라 들어온 최석립 중령(총장 연행시 정문 통과를 확인 지휘하고 정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음)과 공관으로 이동하여 황 장군에게 상황을 문의하였으나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현재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 해군총장 공관으로 가서 보고하기로 하고 이들을 대동하고 해군총장 공관으로 향하여 도착하였는바 해군참모총장 김종곤도 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현재까지의 공관경비대의 작전상황과 장관의 행방에 대하여 보고하였고, 육군헌병이 상부 지시에 의하여 정승화 장군 연행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기 때문에 현재 누구에게도 지휘지침을 받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공관 지역은 안정된 상태이니 이곳의 처리 책임은 나에게 위임하고 상황 파악을 위해 해군본부로 출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해군본부로 출발하였다. 한편 육군본부사령 황 장군을 육군 공관으로 보내 뒷수습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한편 억류중이던 성 대령과 한 대위는 12시경에 박 장군의 건의로 공관으로 연행하여 계속 심문하였으나, 우리는 상부 명령에 따라 정 총장을 연행한 것 외는 그 이상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는 일관된 답변만 되풀이하였다. 대담하던 중 "버스 안의 사복한 사람은 누구냐?"라고 질문하니, 보안사 수사관이라 하기에 장교이므로 새벽 1시 반경에 수사관을 공관으로 연행하여 심문을 하여 보니 상부명령에 따라 정 총장을 연행한 것 외에 그 이상은 전혀 알 수 없다는 똑같은 답변이 되풀이되므로 그들을 계속 연금 상태로 두었다. 그때의 상황진전은 계속 오리무중이었고, 시간이 흘러가므로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몰랐고, 억류된 부대 구출을 위해 역습 부대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끝까지 사수한다는 각오를 헌병감 박 장군과 다짐했다.

 

한편 공관 지역에서의 비상사태 발생에 따라 공관 정문 앞 도로상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5분대기조, 해본5분대기조, 수경사 5분대기조 그리고 합수부측에서 공관 지역에 억류된 육본 헌병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김진영 중령(후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하는 30경비단(80여 명)5분대기조가 출동하여 공관 정문 도로상에 극도의 혼잡을 이루고 공관 정문초소에서의 강력한 저지와 상황의 불투명한 야음으로 인한 피아 식별의 곤란 등으로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서로 대치상태로 있었고 공관 정문 도로는 차단된 상태로 차량통행은 불가능하였다.

육군총장 공관에서의 정 총장 연행은 허삼수 대령, 우경윤 대령 및 수사관 3명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성환옥 대령, 최석립 중령이 지휘하는 헌병 병력(61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그날 육군참모총장은 공관에 도착한 수사관 일행을 공관 응접실에서 맞이했다. 수사관들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전)정보부장 김재규로부터 돈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받아야겠으니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 주셔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에 정총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연행허가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재천 소령(수행 부관)을 불러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연결토록 지시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불응하였다.

한편 이재천 소령이 부관실에서 전화를 거는 순간 합수부 김대균 소령, 한길성 소령과 박원철 상사 등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하여 이재천 수행부관과 김인선 대위(경호 장교)가 부상하였고 합수부 박원철 상사가 부관실에서 뛰어 밖으로 나가 M16소총을 갖고 들어와 소총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대형 유리창을 깨고 정총장을 위협하면서 허대령과 같이 정총장을 사전에 대기시켜 놓았던 보안사령관 승용차(슈퍼살롱)에 태워 저녁 7시 27분경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러한 정 총장 강제연행을 목격한 당번병 김영진 병장은 반일부 준위(공관관리장교)와 임승훈 일병(당번병)에게 알림과 동시 그들과 함께 허, 우 대령의 총장연행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 임 일병이 헌병초소에 알리려 밖으로 나가다가 공관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보안사 수사관 김덕수 준위에게 체포되었다. 반일부 준위도 초소에 알리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으니 수발의 총격을 받고 피신하였으며 총장 운전병 장관식 상사도 부관실을 들여다보다 수발의 총격을 받고 현관 쪽으로 피신하였다. 이 무렵 우 대령이 장광식 상사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중 총탄을 맞고 현관 안 복도에 쓰러졌고 당시 공관 안에는 9명의 장병이 근무하고 있었으나 평소에 무장한 사람은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뿐이었다.

 

부상을 입은 이재천 소령은 의식을 회복 후 육본 상황실 육군차장 윤성민 중장,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 국방부장관실 등에 총장 납치 사실을 보고하고 김인선 대위가 부상으로 신음중인 것을 발견하고 구급차의 긴급요청을 하였다. 이때 의식이 몽롱하여 비틀거리는 이 소령은 부근에 있던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에 공관 부근 담을 넘도록 처리하여 공관을 벗어나 순천향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한편 부상당한 김인선 대위는 공관 뒷문으로 빠져나가 그곳 연못 속에 뛰어들어 약 두시간 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물에서 나와 부하 헌병을 만나 직속 상관인 육본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에게 보고되어 그의 도움으로 순천향병원에 이송되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급박한 상황의 종료지시는 이튿날 12월 13일 아침 5시 30분경 하달되었다. 김용휴 국방차관으로부터 상황이 끝났으니, 억류중인 병력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받고 무기와 장비를 되돌려 주고, 6시경에 공관 지역을 떠나도록 조치함으로써 악몽같은 12.12 하룻밤의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12.12 사태에서 해병대 공관경비대에 의한 투철한 책임감과 사명의식에 의한 임무완수는 군인으로서 한점 부끄럼 없는 용감하고 훌륭한 해병정신의 표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임무수행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 첫째는 나를 직접 몸으로써 방탄보호해 준 병사들에 대한 충성스런 행동에 대한 고마움이다.

 

둘째는 그날 현장에서 상황을 체험했던 육군 헌병중대장 한 대위의 "사령관님 지휘관의 위력이 그렇게 위대한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감탄하는 말이다.

 

셋째는 어느 병사가 "사령관님 우리 육군하고 한바탕 합시다."하는 해병대의 용기와 기질은 물론 가족적 단결과 충성심을 재확인한 사실이다.

 

넷째는 육군총장 연행이 10분 정도만 더 지연되어 정문초소를 우리가 탈환한 이후였다면 많은 상황이 변화하였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다섯째는 12.12사태 그 다음날 보안사령부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고 신상에 변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당당하게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했으니 명예롭게 받아드릴 각오 하에 보안사에 도착하여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의 안내를 받아 사령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응접실로 들어서니 그곳에 앉아 있는 분들이 모두 낯익은 분들이었기에 순간 마음이 안도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황영시 중장(1군단장), 유학성 중장(군수차관보), 차규헌 중장(수도군단장), 김윤호 소장(보병학교장) 네 분이 있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옆방에 있었다. 본인에게 "수고했소"라는 격려가 있었으며 별다른 말은 없이 무거운 분위기에 한참 앉아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본인이 불쑥 "이번 기회에 사령부를 부활시켜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황영시 장군이 김 장군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말에 위축되어 몸을 조아리고 앉아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공관경비대의 임무는 훌륭하게 수행됐으며 충성스럽고 용감한 대원들의 행동이 해병대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여담으로 그 직후 공관경비대 교체설이 있어 본인이 공관으로 주용복 국방장관을 방문하여 "12.12 사태시 해병대의 행동을 기억하시지요. 우리는 장관님을 보호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여 장관을 설득시킨 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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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군사반란과 해병대 총장공관경비대, 33헌병대

    -황인주 소령 공관 경비대장 -한동성 대위 33헌병대 중대장 -김정호 중장 해군제2참모차장(제13대 해병대 사령관)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일본제 수퍼싸롱 승용차 두 대(우경윤 대령, 허삼수 대령 및 수사관 3명)가 정문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 후 통과시켰고, 19:10경 육군헌병 백차 1대가 25인승 마...
    Date2010.07.10 By운영자 Views9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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