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지 특집“해병 혼을품고사회속으로” / 해병대지 40호 대위 장유진
- 해병대여서 행복하고 음악이 있어 즐거운 노(老)목사의 유쾌한 이야기
- 모군을 돕기 위한 순회공연을 계획하는 영원한 해병
명성은 익히 들었다. 지금의 아이돌을 능가하는 인기 록 그룹 키보이스의 멤버. 병 110기 해병군악대 출신. 이미 이 두가지 이력만으로 거대한 산을 만난 느낌이다. 키보이스가 누구인가? 한국 가요계에 록밴드를 최초로 선보이며 그야말로 열풍의 인기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한국 가요사에 있어서도 발전의 분기점을 마련한 전설의 록 그룹이다. 마치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와 이들이 한국 가요계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교육훈련단 신
병교육대에는 1150기가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병 110기는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까마득한 대선배. 떨리는 마음으로 남산터널 건 예장동에 있는 윤항기 목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뽐내는 그의 학교, 예음음악신학교 총장실의 문을 열었을 때 당당한 풍채와 미소를 머금은 노신사가 나를 반겼다.
젊은 신세대 해병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해병의 만남은 그렇게수줍게 시작되었다.
“난 솔직히 먹고살기 힘들어서 해병대를 왔어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여동생(가수 윤복희님)과 어렵게 자랐거든. 동생이 15세에 해외로 가고 나 혼자 남게 됐는데 막노동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어디 의지할 사람도 없고 해서 먹고 사는 걱정을 덜고 싶었어. 타군은 학력을 따졌었는데 해병대는 아니었거든. 내가 초등학교만 나와서 말이에요. 호구지책으로 지원한 해병대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이야.”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해병대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보인다. 해맑은 선생의 표정을 보고 도저히 다른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었을뿐더러, 군악대 생활이 어떠했기에 지금까지도 해병대 이야기만 나오면 행복해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병110기해병의 군생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16주 훈련을 받고 포항으로 배치받았는데 그때 건물이 지금 포항비행장에 있었어. 아휴~ 아주 열악했지. 거기서 이제 막 포항 사단 주둔지를 만들려고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우리 군악대뿐 아니라 의장대, 헌병대 등등 직할대는 주된 과업이 작업하는 것이었어. 각 부대가 맡은 주된 임무에 더해서 포항에 주둔할 사단의 터를 닦는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 그때 군대가 먹는 것이라도 넉넉하게 나오던가? 아니거든. 그런 고난 속에서 전우애가 피어난 거야. 그러고 보면 나는
군대에 와서 총도 쏴봤고, 주둔지 경계근무도 서봤고, 악기도 불어봤고, 삽질까지 원없이 해봤어. 허허.”
의장대와 군악대는 멋있다. 그래서 수많은 해병대 행사와 지역 행사에 해병대 군악대와 의장대는 빠짐없이 참가하며 멋있고 듬직한 해병대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 있다. 특히 군악대는 자체 연주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방부 주관 연주회에도 각 군의 군악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뛰어난 실력을 뽐내고 있다. 당시 군악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예전에는 행사가 더 많았지. 지금하고 있는 전적행사뿐 아니라 당시에는 모병홍보를 위해서 봄, 가을로 일년에 두 번 동해안을 일주했었거든. 그래도 군악대가 가서 연주할 때면 시민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열렬히 환영해 줬었어. 빨간명찰 군악대 옷을 입고 그렇게 환영과 인정을 받을 때의 뿌듯함은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거야. 포항에서는 주로 활주로에서 연주를 했어. 포항으로 오는 귀빈은 주로 공항을 통하니까. 포항 겨울이 보통 추운 게 아니잖아. 탁 트인 활주로에
서 그 겨울 바닷바람 다 맞으면 악기가 제대로 연주가 안 된다고. 그래도 악을 쓰고 연주하고 ‘수고했다’ 한마디에 또 고생이 스르륵 사라지고 그랬지. 그렇게 경비근무 서고, 연주하고 작업하니까 3년은 금방 가더구먼.”
군기가 셌던 60~70년대 군대, 그중에서 가장 군기가 강했던 해병대원들의 내무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엿들을 수 있었다.
“포항 군악대는 총원이 60명 정도였는데 간부가 40여 명이고 병은 20명 겨우 됐었어. 20명 대원들끼리도 정말 잘 뭉쳤지만, 60명 군악대 인원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냈어. 당시 군악대와, 의장대, 헌병대가 한 곳에 같이 있으면서 연병장을 함께 썼는데 눈만 뜨면 서로 비교가 되니까 군기를 많이 잡았는데,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들이 강해서 저절로 군기가 잡혔어. 그런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성과들을 일궈내면서 해병대와 군악대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피어난
거지. 생각해봐. 해병대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해. 일상용품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니까. 연평도를 봐. 한국전 때가 썼을 법한 낡은 무기들을 방치하고 방어하라고 했다니...울화가 치밀더라고. 그래도 연평도 포격도발로 인해 해병대의 열악한 실상이 널리 알려지고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해병대가 이렇게 오늘날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요. 선배들이 고생하면서 뿌린 씨앗이 밀알이 되어 잘 자란 듯해서 흐뭇해.”
내무생활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 해병대에 대한 자랑으로 마무리되었다. 해병대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해병대를 위한 그의 포부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기회가 되면 해병대를 돕기 위한 모금순회공연을 하고 싶어.해병대 출신의 연예인들이 많아요. 해병대라는 타이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거에요. 아주 반응이 좋고 성공적일 거라고 생각해. 대도시를 중심으로만 해도 해병대가 국민과 함께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젊은 층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도록 잘 기획해야겠지. 그렇게 해서 모군이 필요로 하는 장비라도 지원해주면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내가 어릴 때부터 미군부대에서 밴드를 하면
서 봐왔는데 미 해병대는 엄청나. 그 화력이 어마어마하거든. 하지만 우리 해병대는 아직도 많이 열악하잖아. 가슴이 아파요. 내가 여력이 남아 있을 때 반드시 모군을 위한 프로젝트를 실행할 거야.”
한국 가요계의 대 원로가수가 추진하는 해병대를 위한 순회공연! 계획만 들어도 숨이 찬다. 해병대 출신의 연예인들이 주도하고 사회각계의 명사들이 게스트로 참여해서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축제의 장. 그것이 도시별로 순회하며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또 해병대와 국민이 얼마나 소통하며 가까워질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포부를 밝혀오니 더욱 믿음이 간다. 어느새 현실로 다가와 순회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만 같
은 든든함이 느껴진다.
모군사랑이 가득한 그에게 최근 해병대 총기사건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정말 가슴 아팠지. 그런데 그들을 책망하기에 앞서서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요즘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한 거지.”
해병대 이야기만 하면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던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해병의 진심이 담긴 조언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항상 양지만 있을 수는 없어요. 세상의 이치가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함께 있는 것이거든. 우리 해병대도 그래요. 강인하고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음지도 있기 마련인 거지. 아픔이 있었지만 이를 새옹지마로 삼고 더 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강군이 되어야 해요.
성장통으로 삼고 더욱 발전하고 진보해야 하는 거지. 해병대 사건이라고 하면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뜻하는 거야. 적은 숫자로도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어져 온 우리 해병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지. 병영문화가 선진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으니까 진정한 대한민국의 힘이 되어야 해요.”
힘겹게 해병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지금은 목사로서 복음전도에 힘을 쓰고 있지만 인기가수 윤항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 록밴드라는 장르를 최초로 도입한 “키보이스”
의 멤버. 계보를 따져보면 아이돌 밴드인 ‘FT아일랜드’나 ‘CNBLUE’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전역과 함께 시작한 키보이스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입대 전부터 미 8군에서 밴드를 하면서 드럼을 쳤는데 1963년에 전역하고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키보이스’활동을 시작했죠. 비틀스를 롤모델로 한국에 도입한 록밴드였는데,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걸? 당시 한국 가요는 연주자 따로 가수 따로였는데 우리는 연주하면서 직접 노래하는 그룹사운드였으니까. 무대에 오르면 인파가 상상을 초월했어. 지금이야 인기가수 물어보면 여러 가수가 나오지만 그때는 그룹사운드하면 우
리밖에 없었거든. 허허. 지역에 행사가면 오픈카를 타고 퍼레이드를 했다니까. 지금 K-POP의 인기도 우리 그룹사운드 출신의 음악가들이 이끌고 있다고 자부해요. 그들이 다 작사, 작곡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잖아.”
그의 말대로 그는 최고의 대중가수였다. 1977년에도 그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방송국을 돌며 노래를 불렀고, 밤에는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으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쓰러졌다. 폐결핵 말기였다.
“60년대 후반에 위문단으로 월남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내 생각에 거기서 너무 고생을 한 탓인 거 같아. 그 무더운 나라에서 헬기를 타고 이동하며 하루에 3~4회 공연을 2년간 했으니까. 정신은 해병대 특유의 깡으로 버텼는데 몸은 못 버티고 무너진 거지.”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기 절정의 상태에서 받은 폐결핵 말기의 진단. 그는 시한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내를 따라간 교회에서 인생 2막의 빛을 발견했다.
“병을 고쳐주면 죽는 날까지 세속 욕심을 버리고 참되게 살겠다고 했거든. 그리고 열심히 치료를 받았는데 잘 완치됐어. 그러고 남은 인생을 성직자로 봉사하면서 살고 있는 거야. 맹세한 대로.”
미국 미드웨스트신학대에서 교회음악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 가요계에 그룹사운드를 들여온 것과 같이 한국교회의 목회활동에도 새로운 분야를 도입하며 선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평생 음악을 했는데, 목회에서도 음악을 하고 싶었죠. 그런데 국내에는 그런 과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너무 보람차죠.”
미국에서 정식으로 음악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예음음악신학교를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에 목사를 양성하는 일반 신학교는 많지만 음악 목사 양성기관이 없다. 음악목회가 더 효과가 높다고 믿는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이 어려운 유학을 선택하지 않고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 학교재정이 적자라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힘들지는 않단다.
“이미 인기, 명예, 돈 모든 것을 포기했어. 한때 최고의 대중가수가 이런 말을 하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에요.”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노해병의 사회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병110기이자, 대중가수이자, 목사인 그의 명함에 협회장이라는 직책이 하나 더 있다.
“대중음악이 상업적인 유행가가 아니라 시대와 함께하는 품위있는 문화예술로 인정받도록 노력할 거에요.”
한국대중음악문화진흥협회의 3대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대중음악의 가치를 높이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대중들 속에서 희노애락을 같이 해 왔거든. 그런데 그저 소비문화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폭넓은 분야의 회원이 뭉쳐서 대중음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할 거에요.”
유소년 축구단이 재능있는 청소년들을 발굴해 조기 교육을 펼치는 것처럼 대중음악도 그러한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한다.
“청소년 대상 음악교육안을 개발하고, 대중음악사 자료들도 정리해서 번듯하게 하나의 역사서를 만들어야 하고, 권위있는 대한민국 음악축제도 기획하고 있어. 아~ 아직은 할 일이 너무 많아. 허허”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의욕적으로 뜻한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병대에서 배운 정신력과 추진력, 그리고 체력 덕분이라는 윤항기 선생. 그의 모든 활동 저변에는 지극한 해병대 사랑이 근근이 흐르고 있다.
학교운영과 목회활동, 공연기획 그리고 인터뷰 며칠 뒤에 있을 해병대군악대 정기연주회 초청 공연 준비로 인해 정말 바쁜 와중에도 인터뷰 내내 화기애애 웃음꽃과 에너지가 만발했다. 진심과 열정을 담아 인터뷰에 응해준 윤항기 선생을 꼭 후배들에게 전해달라는 당부의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랑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불과 반세기가 지났을 뿐이지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선배로서 모군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후배들도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주고, 감싸주고 아픔을 같이 나누면서 해병대의 진정한 전우애와 해병혼을 길러주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대표 부대, 정예의 해병대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