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2 18:00

삭발중대 -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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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식_0001.jpg
장단지구전투 당시의 신현준 해병대사령관과 공정식 전투단 부단장, 김종식 제1대대장.(왼쪽부터)

 

 

해병대 1대대장을 두 차례 역임한 김종식 소령은 자신의 묘표(墓標)를 꽂아 두고 출전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해병대 1대대장 발령을 받고 전선으로 떠나면서, 진해 장충단 묘지에 ‘고 해군소령 김종식의 묘’라는 팻말을 만들어 꽂아 두고 갔다. 중공군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결의를 표시한 것이다.

남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신의 몸 일부를 손괴해 그 피로 뜻을 적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는 혈서가 과격한 방법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구두상의 약속이나 서약서 같은 온건한 방법으로 의지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자신이 묻힐 곳의 팻말로 만들어, 가상의 묘역에 박아 두고 가는 것 이상으로 극단적인 방법이 있을까.

전공 힘입어 오명벗고 명예회복

내 뒤를 이어 제2대 1대대장을 역임한 그는 남폭탄의 주인공 남상휘 중령에게 대대장직을 물려주었다. 그뒤 진해 해병학교에서 복무하다가 다시 1대대장 발령을 받았다. 중공군의 두 차례 대공세로 우리 해병대의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는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미안해했다. 그런 때에 복귀 명령을 받은 그는 해병대의 명예회복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결의를 다진 것이다.

전력정비를 위해 잠시 김포지구로 물러났던 1대대는 1952년 11월 다시 장단 사천강 지구로 복귀해 예비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때 중공군은 강 건너 낮은 야산지대에 몇 개의 전초진지를 구축해 우리 측 주저항선까지 위협하고 있었다.제1전투단에서는 1대대장에게 기습대를 조직해 적 진지 파괴 임무를 부여했는데, 1중대 기습대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묘표까지 만들어 세우고 온 김종식 1대대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중대장 이하 전 장병은 모두 머리를 깎고 필승 각오를 다지라!”중대원을 모아 놓고 질책하면서 김소령은 삭발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 엄상록 중위 이하 전 중대원이 머리를 박박 깎았다. 삭발중대라는 오욕을 씻기 위해 중대원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명예회복을 결의했다.

12월 8일 밤 적진지 기습작전에 나선 1중대는 멋지게 임무수행에 성공했다. 우일선 전방의 적 진지를 파괴하고 3명의 포로까지 붙잡아 왔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린 덕에 1중대는 삭발중대라는 오명을 벗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저항선을 떠맡아 정전협정이 맺어지는 날까지 서부전선을 지키는 주력부대가 됐다.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 '김종식' 소령

내가 초대 1대대장으로 있을 때 그는 연대 작전주임 보직에 있었던 대위였다. 김일성고지 전투 때 김대식 연대장이 부상을 당해 부연대장으로 승진하게 된 나는 그를 1대대장 후임으로 천거했다. 탁월한 통솔력과 용감성을 평소 눈여겨봤던 것이다.

그가 두 번째로 1대대장이 된 것도 나의 추천 때문이었다. 일선 지휘관 생활이 짧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사령부에 품신한 것이다. 전장에서 한 번 맺은 인연은 오래 지속되는 법이다. 전쟁이 끝난 뒤 내가 제3전투단장으로 있을 때 나는 또 그를 불러 부단장을 시켰다.

검도 5단의 실력을 가진 그는 타고난 무인이었지만, 관운이 닿지 못해 대령으로 예편했다. 명운(命運)까지 짧아 그는 전역 후 병마에 시달리다가 이승을 떠났다. 그 뒤 전쟁기념관 호국의 인물 선정 심사위원으로 일할 기회가 있자,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자랑스러운 호국의 인물로 추천했다. 그래서 그의 넋은 지금 전쟁기념관 호국의 전당에 잠들게 됐다.
김종식 소령.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 있는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 ㅡ 국방일보 2008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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