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량 前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중 해병대와 공군의 다툼

by 운영자 posted Sep 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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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노선 놓고 서로 사소한 시비 해병대의 공군 비행장 습격 불러

 

1966년 8월2일,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이 진해의 대통령 별장으로 휴양차 떠나자 나는 첫 업무로 전용기에 동승, 수행했다. 미리 여의도 공항으로 나가 대통령 전용기이자 공군 1호기인 C-54기(4발 프로펠러기)와 조종사·부조종사들의 조종 상태를 점검하는데 김성은 국방부장관과 박원석 전임 총장, 그리고 대통령이 차례로 공항으로 나왔다.

진해 바다 남쪽 조그만 섬의 별장에는 좋은 낚시터가 있어 낚시하며 생각을 가다듬는 데 좋았다. 나는 공군을 보다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공군 현대화 작업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 하는 구상을 가다듬었다. 대통령이 이런 기회를 주기 위해 특별히 나를 별장에 동행시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참모총장 직무 테스트를 하기라도 하는 양 김해비행장에서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4-1.jpg대통령을 수행하고 서울로 귀환한 다음 날, 김해비행장의 공군 병사들과 진해의 해병대 병사들이 충돌해 해병대 병사 한 명이 죽고 쌍방 엄청난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사고의 시발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다. 공군 병사 7∼8명이 일요일 부산으로 외출 나갔다가 귀대하기 위해 부산발 진해행 완행버스를 탔던 모양이다. 그 버스에는 진해 기지의 해병대 병사도 1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공군 병사들이 낙동강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김해비행장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내리지 않고 잠깐 김해비행장으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라고 운전사에게 요구했다. 그러잖아도 공군 병사들을 아니꼽게 보던 해병대 병사들이 “버스는 정해진 코스로 가게 돼 있는데 너희들이 뭔데 자가용 부리듯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버스를 세워 놓고 치고받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공군 병사들은 수도 적은 데다 해병대 병사들의 주먹을 당해낼 수 없어 고스란히 얻어터지고 귀대했다. 얼굴과 머리가 터져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을 본 동료 병사들이 분기탱천,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해 진해행 완행버스를 추격했다. 김해와 진해의 중간 지점쯤에서 버스를 발견한 공군 병사 20여 명이 버스를 기습, 해병대 병사들을 끌어내렸다.

이렇게 해서 다시 패싸움이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공군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 해병대 병사들이 묵사발이 돼 버렸다.

복수하고 돌아온 공군 병사들이 목욕하고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해병대 병사 40여 명이 트럭 네 대에 분승해 김해비행장으로 몰려왔다. 동료 병사들이 공군 병사들의 습격을 받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 역시 트럭을 몰고 김해비행장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해병대 병사들은 기지 내의 공군 병사·장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로 찼다. 이런 중에 이들이 던진 돌멩이가 비행기 기체 여기저기에 맞아 비행기가 망가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위기를 느낀 주번 사관이 비상을 걸어 전 병력 출동 명령을 내렸다.

해병대 병사들은 트럭 네 대분의 병력이지만 공군은 안방인 데다 전투비행단으로서 병력이 수천 명이나 된다. 전 병력이 출동했으니 아무리 ‘귀신 잡는 해병’이라도 당해낼 리는 만무한 일이다. 이번에는 해병대 병사들이 잡히는 대로 얻어터졌다. 장교들까지 가세해 정문과 주요 게이트를 가로막고 해병대 병사들을 잡아 두들겨 패는데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던 그들은 이윽고 철조망을 뚫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철조망 건너에는 갈대숲이 우거진 낙동강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갈대숲을 헤쳐 가기도 어려운데 지류의 물살이 엄청나게 빨랐다. 부상한 해병대 병사들이 이곳을 건너다 한 명이 죽고 6∼7명이 탈진해 병원에 실려 가는 사고가 일어났다. 물론 공군 병사도 수십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해병대의 공군 비행장 습격 사건이다.

 

공군과 해병대는 맹우(盟友)

 

사소한 싸움으로 해병대 병사 한 명이 죽고 쌍방 간에 수십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적과 싸워도 인명 피해를 줄여야 하는 판에 젊은 혈기라고 하지만 아군끼리, 따지고 보면 동료나 친구끼리 사소한 시비로 죽고 죽이는 참사로까지 이어졌으니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문제가 아니었다. 성질대로라면 가담자들을 모조리 영창에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보고를 받았는지 분을 못 이기고 있었다. 나는 강사령관에게 제의했다.

“우리 빨리 현장으로 내려갑시다. 비행기를 낼 테니 지금 떠납시다.”

나는 해병대사령관 출신인 김성은 국방부장관에게도 약식 보고를 하고 강사령관과 함께 해병대 진해 기지로 들어갔다. 일부러 해병대부터 찾은 것이다. 연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진해 기지는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병사가 죽었다고 하자 장교단도 흥분하고 있었다.

강사령관의 지시로 전 병력이 연병장에 모였다. 나는 도열한 병사들 앞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중장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여러분 앞에 서니 면목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웃의 공군 병사들은 너희들의 가장 듬직한 형제들이다. 그릇된 형제가 있으면 버릇을 고쳐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그들을 대신해 사죄하러 여기 왔다. 죽은 병사의 명복을 빌고 부상한 용감한 해병대 병사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러면서 공군과 해병대와의 전우애를 강조했다.

“사실 해병대와 공군은 전투 수행상 다른 어떤 군보다 가까운 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병대와 공군은 서로 협력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내가 강릉전투비행단장으로 있던 6·25전쟁 때 미 해병대 비행전대원들과 합동 작전으로 동부 전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많은 땅을 빼앗아 오늘의 휴전선을 만들었다. 이런 공군과 해병대가 사소한 혈기로 죽음을 부르는 싸움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안타깝다. 이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공군참모총장인 내가 공군 병사들을 단속하겠다. 해병대원 여러분의 남아다운 기백으로 멋지게 한 번 용서하기 바란다. 앞으로 더 친한 전우가 될 것이다.”

나는 실례로 김포에 주둔한 해병대 기지와 김포전투비행단이 피를 나눈 친구처럼 가깝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공군과 해병대의 충돌은 내가 김포 11전투비행단 시절(1958~61년)에도 자주 일어났다. 김포 반도에는 해병대 기지가 많다. 해병대 병사들은 외출 나오면 김포 읍내나 김포공항 인근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이때 김포전투비행단의 공군 병사들과 맞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툭하면 해병대원들이 공군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나는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나갈 수 없어 며칠 궁리 끝에 해당 기지의 해병대 여단장에게 제의했다.

“내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해병대 병사 10명을 선발해 공군에 보내 줄 수 있겠습니까. 5일간 데리고 있다가 보내 주겠소. 대신 해병대도 우리 공군 병사 10명을 받아 해병대원과 함께 훈련받고 식사와 잠자리도 함께 하면 어떻겠소?”

해병대 여단장 역시 골치를 썩이고 있는지라 좋은 아이디어라면서 당장 10명의 해병대원을 김포전투비행단으로 보내 줬다. 나는 특별히 공군전투비행단 기지로 파견된 해병대원들의 숙식을 체크하며 함께 훈련과 운동을 즐기도록 조치했다. 이윽고 5일을 마치고 송별회가 열렸는데 병사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석별을 아쉬워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해병대 기지에 간 우리 병사들도 그들과 끈끈한 우정을 나눴다.

공군참모총장이 직접 진해 기지에 내려와 이런 일화까지 소개하니 해병대 병사들은 진정됐고 오히려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그들을 진정시킨 뒤 나는 강사령관과 함께 김해전투비행단으로 향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