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해설가 이용수 "한국대표팀의 월드컵 결승 진출이 첫번째 꿈이고, 두번째 꿈은 그 경기의 해설을 맡는 겁니다" / 스포츠한국 김석현 선임기자 2012.12.12 15:19:20
▲ 대학 교수보다 축구 해설가로 더 명성
그의 본래 직업은 대학 교수다.
한데 우연한 기회에, 정말 우연한 기회에 TV 방송의 마이크를 잡은 것을 계기로 오늘날의 '명(名) 축구해설가 이용수'가 존재하게 됐다.
실제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수' 하면 "아, 그 테레비에서 축구 해설하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아, 그 대학 교수"라고 일컫는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그가 대학 교수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일 지도 모른다.
그 만큼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공중 매체의 영향력이 큰 탓이 아닐까.
어쨌거나 그는 현재 '세종대 체육과 교수'라는 '본직'보다는 'KBS 축구 해설위원'이라는 '부직(副職)'으로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과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용수(54).
축구에 대한 광범위한 이론과 지식을 차분한 목소리에 담아 축구 해설가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세상이 함박눈으로 말끔히 덮여있던 지난 7일, 그의 연구실인 서울 광진구 군자동 소재 세종대 용덕관 111호실을 찾았다.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대학 교수'로 불리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불리기를 원하는지.
"제가 축구선수 출신이기는 하지만 가장 첫 번째 직업이 대학 교수 아닙니까. 축구 해설가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얻게 된 부차적인 직책이고요. 그러니 축구해설가보다는 대학 교수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얘기가 나온 김에 축구 해설을 하게 된 동기부터 들어보자.
"1994년 초였을 겁니다. 그때 동대문운동장에서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있었거든요. 본부석 반대쪽 스탠드에서 한참 관전을 하고 있는데 어떤 모르는 분이 제게 다가 오시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해설 좀 하실 수 없을까요' 이러는 거에요."
사뭇 흥미롭다. 무슨 얘기가 계속될까.
"생각해 보세요. 다짜고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와서 해설을 할 수 없겠냐니. 그래서 우선 선생이 누구시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이 분 말씀이 자기가 KBS 중계요원인데 오늘 해설하기로 약속한 분이 갑자기 못나왔으니 절더러 그분 대신 해설을 좀 하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나요."
"당연히 못한다고 했지요. 해설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랬더니 그 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아주 난감해하지 뭡니까. 하는 수 없이 그 분을 따라가서 그냥 마이크 앞에 앉았지요, 뭐. 이게 제가 축구해설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서두에도 썼듯이 우연치고는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닌가. 사람의 운명이 극히 하찮은 계기에 엄청나게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가 실체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해설 데뷔전'은 무난하게 치렀을까.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기억나는 건 골이 들어가면 '네 참 잘했네요', 또 슛이 빗나가면 '네, 참 아깝네요' 했다는 것 밖에는 없으니까요. 이런 사정을 모르시는 시청자들은 아마 많이 웃으셨을 겁니다. 해설한다는 놈이 뭐 이러냐고요."
원래 해설하기로 돼 있던 분이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만약 그 분이 그날 예정대로 해설을 했다면 이용수는 오늘도 평범한 교수로 강단에 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97년부터 메인 해설자로 활약
축구 해설가로서의 인생 항로를 계속 들어보자.
"그때만 해도 전 그냥 한번 본래 해설자의 빈 자리를 메운 것으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 KBS에서 위성 시험방송을 하면서 유럽축구를 방영했거든요. 한번 대타로 해설을 한 게 인연이 돼서 그 유럽축구의 해설을 계속 맡게 됐습니다."
독자들이 잘 아시는대로 유럽축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영국을 비롯해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까지.
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지는 모든 경기를 도맡아 해설하다 보니 공부도 많이 하게 되고 축구에 대한 시각도 넓어지더라는 얘기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097년 1월부터 KBS의 메인 해설자가 됐습니다. 과분한 거지요.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KBS 축구해설위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해설을 하면서 큰 잘못은 없었구나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하게 됩니다."
1997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시작했으니 새해 1월이면 16년, 그동안 TV와 라디오 해설 횟수를 합하면 대략 500~600게임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대회만 따져 봐도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비롯해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6년 독일월드컵, 2008년 베이징올림픽, 그리고 지난 8월의 런던올림픽….
한국축구가 세계 4강에 올랐던 02년 한일월드컵 때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있어 '마이크'를 잡지 못했고 10년 남아공월드컵에는 KBS가 중계방송단을 파견하지 않아 해설할 기회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고 인상적인 경기는.
"아무래도 지난번 런던올림픽이지요. 시기적으로도 가장 최근이고 또 우리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지 않았습니까. 인상적이었다기보다는 감격적이었다고 말씀드리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독일월드컵 스위스전 두 번째 실점은 명백한 오프사이드
그런데 여기서 이용수에게 꼭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2006년 6월24일, 독일월드컵 예선 3차전 스위스 전에서의 '오프사이드 논쟁'.
한국이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스위스에게 허용한 두 번째 실점이 오프사이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다 지난 일 이제 와서 새삼스레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껏 이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축구계 인사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어떤 TV 방송의 해설자는 그것이 오프사이드가 아니어서 스위스의 득점을 인정한 주심의 판정이 옳다고 해설을 했다가 국민적인 반감을 사 결국 해설가로서의 이력을 접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지 않았던가.
우선 이에 대한 이용수의 '해설'.
"오프사이드는 일반적으로 상대 팀의 최종 수비수보다 더 안쪽에 들어가 있는 자기 팀 선수에게 패스를 했을 때 성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물론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드시 패스를 하지 않았어도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자기 팀 공격수에게 패스를 하려는 의도만 갖고 있어도 오프사이드가 성립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오프사이드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 11조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용수의 이 '해설'을 당시 스위스 전의 상황에 적용시켜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먼저 그 때 상황을 돌이켜 보자.
스위스 공격수가 한국 문전 왼쪽에서 반대쪽에 포진하고 있는 최종 공격수를 향해 패스를 했는데 이를 차단하기 위해 미드필드에 있던 수비수 이호가 '백코트'를 하며 달려 들어오다 발을 갖다 댄 것이 그 최종 공격수에게 흘러가 '외통수'가 돼버렸던 것.
이것이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설명했던 해설자의 논리는 스위스 공격수가 곧바로 자기 팀 최종공격수에게 패스를 했다면 오프사이드가 되겠지만 이 경우는 이호의 발을 맞고 스위스 최종공격수에게 간 것이기 때문에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FIFA 규정을 원용한 이용수의 주장은 이호의 발을 맞고 안 맞고를 따질 것 없이 스위스 공격수가 한국 최종수비수보다 안쪽에 들어가 있는 자기 팀 최종공격수에게 패스를 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시점에 이미 오프사이드가 성립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스위스 선수가 동료에게 패스할 시점에 기(旗)를 든 선심의 오프사이드 사인을 무시하고 스위스의 득점을 인정한 주심의 판정은 분명한 오심이었다는 게 이용수의 설명.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오프사이드는 상대방 최종수비수보다 안쪽에 들어가 있는 자기 팀 공격수에게 패스를 했는지 안했는지의 행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패스를 할 의도를 가졌는지 아닌지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으로 봅니다."
▲한국축구계는 소통 부재가 가장 큰 문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건국 이후 양대 스포츠 행사였던 2002 한일월드컵을 치렀던 '축구 행정가'의 입장에서 한국축구계의 문제점에 대해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을 듯싶다.
"외람되지만 한국축구계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대한축구협회 수뇌부의 의사결정구조가 상당히 퇴행적이라는 점을 들고 싶은데요. 개략적으로 봐서 회장 밑에 의결기구인 이사회가 있고 그 밑에 일반직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장 아래 단계인 일반직원들의 건설적인 생각이 이사회에서 제대로 토론조차 되지 않으니 회장에게도 전달이 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회장을 포함한 상층부 내지는 최고위층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일이 결정되고 처리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네. 지난 일이지만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 경질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표팀 감독의 진퇴문제를 다루는 기술위원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이를 거치지 않고 회장단 몇 분이 모여서 그냥 결정을 해버리고 뒤처리만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형태가 돼버렸거든요. 이런 구조에서는 협회의 건설적인 발전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지난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그랜드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던 '한국축구사(士)회'의 원탁토론회를 예로 들었다.
"이 토론회는 초ㆍ중ㆍ고 지도자 200여명이 모여 한국축구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취지였는데요. 거기서 아주 건설적이면서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의사소통 문제를 비롯해서 지도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문제, 그리고 한국축구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제언 등등. 그런데 여기서 취합된 현장 지도자들의 의견이 단 한 가지도 협회 상층부에 전달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알고 계시겠지만 조중연 회장님이 차기 회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시겠다고 결정하신 데는 정 명예회장님의 의사가 상당 부분 반영됐거든요. 그런데 명예회장님이 갖고 계신 생각은 이런 거 같습니다."
이어질 말이 아주 궁금하다.
"명예회장님은 1993년도부터 15년이나 대한축구협회를 이끌어 오시다가 4년 전에 축구인 출신인 조 회장님께 바통 터치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조 회장님이 지난 4년 동안 하시는 걸 잘 지켜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이거지요. 축구인한테 더 이상 협회를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됐다 이겁니다."
정 명예회장이 차기 회장 선거에 관여를 할지, 한다면 누구를 내세우고 지원할지 그것까지 알 수야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판단하면 정 명예회장이 4년 전 자신의 '한시적 후계자'로 내세운 조 회장에 대해 적잖이 실망을 하고 있는 것 만은 분명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용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축구협회장 상(像)'은 어떤 것일까.
"우선 축구협회 수장은 축구인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요. 축구인 중에서도 열정이 있는 축구인이 협회를 이끌어야 합니다. 아울러 미래를 준비하는 비전을 가진 분이 회장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같은 비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영 마인드에다 연간 100억원 가량의 자금은 융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분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이같은 여러 가지 '덕목'을 두루 갖춘 인사를 거명할 수 있는지 물었다.
"아, 그건 노코멘틉니다."
▲초등학교 때 포지션은 라이트 윙
이용수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영신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 1969년.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어릴 적부터 축구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고향이 영등포구 신길동이거든요. 그래서 인근의 영신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매일 공부는 안하고 축구만 했지요. 그랬더니 5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홍성식 선생님께서 교장 선생님께 건의를 하셔서 아예 학교에 축구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게 제가 본격적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습니다."
'옛날 어린이'치고 이용수처럼 동네에서 축구 깨나 안 해본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이용수는 조금 유별났던 모양이다.
담임 선생이 '이용수와 그 친구들'을 위해 교장에게 건의해 축구팀을 만들 정도였다니.
"팀을 만든 5학년 때는 별다른 성적을 못 냈고요. 6학년에 올라와서는 전국어린이축구대회에서 2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라이트윙을 봤는데요. 특별하게 잘 했거나 득점상을 받았거나 한 기억은 없습니다."
체력과 적성 테스트를 거쳐 입학한 서울 체육중에서는 미드필더로 전향해 게임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았고 서울 체육고에 진학해서도 줄곧 미드필더로 활약했는데 1, 2학년 때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3학년에 올라와 전국선수권대회를 3차례나 제패하는 강세를 보였다고.
체육 동일계 진학으로 서울대 사범대 체육학과에 진학했는데 서울대가 축구로는 그다지 명문이 아니어서 이용수 역시 대학시절에는 명성을 날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해병대에서의 군복무에 이어 상업은행, 럭키금성(창단멤버. 84년), 그리고 할렐루야에서의 선수생활을 끝으로 현역시절을 마감하고 86년에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90년 8월까지 스포츠생리학을 연구했다.
이 때의 연구실적을 바탕으로 지금도 세종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후학들에게 한 주일에 9시간씩 생리학과 해부학을 강의한다고 한다.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가 된 것이 1993년 1월, 해만 바뀌면 20년이 된다.
생리학은 그렇다 치고 해부학을 가르친다는 게 다소 의아하다. 세종대에 의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의 몸을 째고 수술을 하는, 그런 해부학이 아니라 인체의 구조를 연구하고 건강 증진을 위한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축구 스타플레이어 출신에다, 국내 최고의 축구 해설가에다, 대학교수로 해부학까지 가르친다니…. 별반 내세울 것이 없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결승전 진출이 소망
이렇게 다양한 이력을 갖추고 있으니 당연히 앞으로의 포부도 많지 않겠는가.
"포부라기 보다는 그냥 소원하는 것이 있는데요. 먼저 후배 선수들이 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가 상대와 겨루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기면 더욱 좋겠지요. 그 경기를 제가 해설할 수 있다면 더 더욱 기쁘겠고요."
10년 전 한일월드컵 때 목표가 16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목표를 몇 단계나 넘어 4강에 도약했던 사실을 상기하니 후배들이 결승전에 올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용수의 소망이 그리 허황된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음 소망은.
"꼭 축구선수가 아니라도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이나 어른들이 마음껏 축구를 즐기며 축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데 미력이지만 제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축구 자체의 가치를 높이고 축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상생(相生)의 세상을 만드는데 축구가 가교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대담을 마친 뒤 학교 인근의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용수가 사주는 탕수육과 짜장면에 고량주까지 한잔 곁들이고 나오니 함박눈 조각들의 크기가 더욱 커져 온 천하가 설국(雪國)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용수 교수 약력
▲생년월일 : 1959년 12월27일 ▲출신교 : 서울 영신초-서울 체육중-체육고-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서울대 교육대학원-미국 오리건 주립대 ▲군ㆍ실업선수 경력: 해병대-상업은행-럭키금성-할렐루야 ▲주요경력 : 체육과학연구원 교수(1990~93년).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1993년 이후 현재) KBS 축구해설위원(1997년 1월 이후 현재)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2000년 11월~2002년 7월) ▲가족사항 : 부인 임재숙(50)씨와의 사이에 3녀(장녀 혜승. 2녀 혜수. 3녀 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