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열매 이승만 (11) 성경 읽으며 해병대 혹독한 훈련 견뎌 / 국민일보 [2010.11.11 17:55]
서울에서 방위군으로 자원입대한 후 18일간 사선을 넘나든 끝에 훈련소인 진해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도착했다. 1951년 1월이었다. 그곳에서 해병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훈련은 제일 세고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지만 보급은 최고로 좋다더라.” 이 말에 나와 성화신학교 동창 중 15명은 “기왕 군대에 들어간다면 밥이라도 실컷 먹게 거기로 가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시험을 보러 경회동 해병대 신병훈련소를 찾아갔다.
간단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마친 뒤 체력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는 기합을 얼마나 견디는지를 측정하는 단계였다. 시험관은 한 사람씩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두툼한 각목으로 엉덩이를 다섯 대씩 사정없이 내려쳤다. “바지 내려! 허리 구부려! 하나! 둘! 셋! 넷! 다섯!” 시험관의 악쓰는 소리와 퍽퍽 소리는 다음 대기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나님! 견뎌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며 한 대씩 매를 견뎌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동생 승규 차례가 된 것이었다. 방위군 대열에서 낙오할 뻔한 아이를 천신만고 끝에 데려왔는데 여기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승규야! 이제는 떨어지면 안 되니까 꾹 참고 매를 맞아야 해.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동생은 생각보다 잘 견뎌줬다. 그러나 동생이 맞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맞을 때보다 몇 배 아팠다. 결과는 우리 17명 모두 합격이었다.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우리는 아픈 것도 잊은 채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이렇게 해병 6기가 됐다. 시험 장소였던 신병훈련소에서 4주간의 훈련에 들어갔다. 소문과 달리 춥고 배고프기는 이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막사 창유리는 다 깨져 있고 그 사이로 들이치는 바닷바람은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난로나 이불도 없었다. 추위에 몇 번씩 잠을 깨고야 새벽을 맞을 수 있었다.
훈련 또한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깜깜한 새벽에 기상명령이 떨어지면 전기쇼크를 받은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나 연병장에 집결하고,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씻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됐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꾸물거리면 바로 구둣발이 날아들었다. 종일 쉴 새 없이 뛰고 구르고 달리며 훈련을 받았다.
다행히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워 분대장을 맡기도 했지만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훈련은 고되고 식사는 너무 적은 터라 많아 보이는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동료와 싸우는 일도 있었다.
나는 점점 짓눌려 가는 마음을 이기기 위해 모두 잠든 시간에 성경책을 읽었다. 피란과 험한 행군 가운데서도 늘 지녀 온 성경이었다. 창에 스미는 달빛을 받으며 읽었던 시편과 예언서들,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줬다. 특히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즐겨 읽었다. 요셉도 갖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했기에 모든 이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그래, 요셉처럼 살아보자.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보는 거다!”
동생 승규와 떨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만도 큰 은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승규는 내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목적이었다. 승규는 성격이 밝아서 중대장 전령병으로 발탁됐는데 중대장이 취사장에서 얻어다 주는 누룽지를 내게 가지고 와 밤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나눠먹곤 했다.
그때쯤 내 인생의 기로가 된 일이 생겼다. 해병부대 본부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