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일. 제주도 동문 로터리 일대에서 ‘해병대 주둔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60년 전 해병대 사령부가 주둔했음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해병대는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하여 한라산의 공비를 토벌하고 4·3사건으로 피폐된 제주도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전력투구한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준비가 부족했던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제주의 젊은이 3,000여명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들이 바로 해병 3·4기. 16살, 17살밖에 되지 않은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인민군과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 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도 이들이었고, 수도 서울을 수복한 것도 이들이었다. 미 해병대도 공략하지 못한 도솔산 지구를 점령해낸 것도, 휴전하는 그 날까지 한 뼘의 영토라도 더 확보하고자 피를 흘린 것도 이들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 지금의 해병대는 제주 해병 3·4기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6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백발이 성한 노해병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는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아직도 구국의 일념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듯 했다.
“당시 지원하는 사람이 몰리다보니 체력검정을 해서 걸러냈어. 나이가 안 되거나 키가 162cm 정도가 안 되거나 달리기를 못하거나 하면 탈락을 시켰거든. 그런데 탈락을 한 사람들이 혈서까지 써가면서 해병대에 들어가려고 한거야.”(최형권, 77세)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알기도 했고, 4·3사건 때 공비들에 의해 양민들이 학살되는 것도 봤었지. 한마디로 구국일념에 의해 출전한 거지. 나라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공부만 할 수 없었어.”(김동학, 78세)8월 5일과 8월 29일 각각 입대한 3,000명의 3·4기생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9월 1일 제주 산지항을 출발한다. 부산에 도착해서야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은 이들은 9월 11일 거대한 수송선에 탑승한다. 전세를 뒤엎을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 위함이었다.
“상륙을 하기 전에 얼마나 포를 때렸던지 온통 암흑천지였어. 상륙할 때 적의 반격도 있었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기를 못 쓰더라고. 항공기와 함포로 완벽하게 적을 압도해버린거지”(김석진, 81세)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해병대는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 시가지를 거쳐 서울수복에 나서게 된다. 미군과 함께 작전을 할 당시의 추억을 꺼내놓는 노해병.
“상륙 다음날인 9월 16일 아침부터 미군처럼 C-레이션만 먹기 시작했어. 얼마나 맛이 없던지. 서울로 진격해서 주둔하는데 추석 이틀
후인 9월 28일 날 주민들이 선뜻 밥을 해주더라고. 13일만에 처음으로 뜨끈뜨끈한 추석 밥을 먹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박영찬, 77세) 인민군 치하에서 시름하던 서울의 주민들에게 우리 국군, 우리 해병대는 따끈한 쌀밥만큼이나 반가운 존재였을 것이다.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들이 잔뜩 걸려있었어. 수색을 하다보면 지하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가족들도 있었고, 인민군에게 끌려갈까봐 다락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청년들도 많았지. 한강 백사장에 인민군이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던 장면은 아직도잊혀지지 않아.” (김석진, 81세) “트럭을 타고 서울 시내를 이동하는데 전투할 때는 숨어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마중을 해주는 거야. 주민들과 우리 모두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스러웠지. 그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어” (김동학, 78세)
서울수복에 성공한 해병대는 다시 인천을 출항하여 묵호, 원산,고성에 상륙하여 북진 작전을 개시한다. 미 해병대와 떨어져 단독으로 작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와는 달리 보급 상황이 좋지 않아졌다고 한다.
“하도 먹을게 없으니까 옥수수를 따다가 철모에 볶아서 먹었거든. 근데 너무 볶아대니까 철모 반대쪽이 반들반들하게 돼서 반짝반짝
거리는 거야. 그래서 장교들이 눈밭에서 적에게 발견될 수 있으니 그만 좀 볶으라고 얼마나 난리를 쳤다고. 그런데 웬걸 나중에 되니깐
중대장, 소대장 철모도 반짝반짝 한거야” (박영찬, 77세) 웃으면서 에피소드를 전해준 노해병은 딱딱한 옥수수를 씹느라 십대 때 이미 어금니가 다 나갔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며 북진을 하던 우리 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게 된다.
“중공군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다섯 명에 한 명만 총을 쥐어 주는거야. 나머지 중공군은 맨몸에 수류탄만 들고 진격을 하는 거지. 앞 사람이 죽어서 총을 떨어뜨리면 그걸 집어서 돌격하고.” (김석진, 81세) 중공군의 공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던 우리 해병대는 재반격
에 나선다.
중동부전선을 무대로 ‘무적해병’의 명예를 얻게 된 도솔산 지구 전투를 비롯,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 등 여러 전투에서 용전분투하여 한국 해병대의 용맹을 세계만방에 널리 선양했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 몇 개로 표현해버린 이 승리를 위해 제주 해병 3·4기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사선을 넘고 넘어 일궈낸 해병대의 명예. 그 뒤에는 십대의 나이에 쓰러져간 전우들의 죽음이 있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노해병들에게 전우의 죽음이란 어떤 기억일까.
“전투에서는 옆에서 누가 쓰러지고 죽어도 슬플 겨를이 없었어. 전우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해도 당장은 오로지 적밖에 안 보이는거야. 전투가 끝나면 그 때 그 기분은 말할 수도 없지.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거지. 그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김석진, 81세)사선을 넘나든 그들. 이들은 말 그대로 생과 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긴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들이 생사가 교차하던 전장에서 살아남아 승리하여 무적해병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용변을 보더라도 항상 삽으로 덮어서 흔적을 안 남겼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도 꽁초를 완전히 분해해서 흔적을 없앴어. 또 항상 몸을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참호를 파서 대비했고. 그렇게 훈련을 받았고 또 그렇게 행동을 한 거지. 그래서 살아남고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 땀 흘려 훈련받은 만큼 피를 적게 흘리는거. 그것이 진리지.” (김동학, 78세)
비록 백발이 성하고 너무나 왜소해진 80대의 노해병들이었지만, 60년 전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생생했다. 점심 무렵부터 노해병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창가로는 붉은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주도의 청소년 3천명이 대한민국을 목숨을 바쳐서 지켜냈다는거, 이거 하나는 대한민국이 기억을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누가 군대를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었어. 오로지 나라가 워낙 위태해서, 또 우리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 누구의 강요가 아닌 우리 뜻으로 그길을 선택한거지. 그런 정신으로 갔기에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정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해냈던 거고.” (김형근, 78세)
그들의 눈빛엔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자긍심과 함께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었다.
“젊은이들이 외치는 자유, 번영, 진보. 그 모든 것은 나라가 있어야 가능 한 것이거든. 그 나라가 없어질 뻔 했던 일이 불과 60년 전이야. 그 위기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 줬으면 좋겠어.이들을 기억해주는 나라가 되어야, 그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홀연히 또 일어서서 나라를 구하는 거야.” (김동학, 78세)
60년 전 4·3사건의 아픔이 채 아물지 않았던 제주도. ‘빨갱이’라는 오명에 몸서리치던 순박한 섬사람들은 나라에 위기가 쳐하자 홀연히 떨쳐 일어섰다. 중학생, 고등학생, 교편을 잡고 있던 이, 농사를 짓고 있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생전 섬을 떠나본 적도 없는 촌사람들이 처음 밟은 뭍은 포탄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이었다. 그로부터 3년, 순박한 섬사람들은 어느새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등의 칭호를 얻는 무적불패의 해병대신화를 남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죽은 자도 있고, 산 자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흐른 오늘, 살아남은 노해병들은 죽은 자들이 없어질 뻔한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들이라고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였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그들은 모두 대한민국을 구한 해병 3·4기였다.
과거는 세월의 바람결에 쓸려 점점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다. 6·25전쟁의 슬픔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도, 서울 수복의 환희도, 도솔산의 신화도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먼 옛날의 이야기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주 해병 3·4기의 이야기를 백발이 무성한 노해병들만의 기억으로 남겨두기엔, 그들이 되찾아준 대한민국의 소중한 가치와 그들이 쌓아올린 해병대의 명예가 너무나 커 보이기만 하다.<해병대지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