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이던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을 불러 말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사나이 하나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장수들은 살려고 마음먹지 마라.” 다음 날 이순신은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330척을 물리치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장의 혼란 속에서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한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2월 15일에도 그랬다. 대한민국 해병 청룡부대(2여단) 11중대는 베트남전의 전략적 요충지 짜빈동(Tra Binh Dong)에서 자신보다 10배의 숫자인 월맹군 연대급 병력의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246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격퇴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해병대’의 신화를 남겼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소위)이었으며, 이후 해병대 2사단장을 지낸 신원배(申元培·63) 장군을 1일 J가 만나 ‘해병정신’을 들어 봤다. 신 장군은 1997년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했으며, 현재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서 그해 곧바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셨죠.
“함께 졸업한 해사 20기 동기 75명 중에 15명이 해병대를 지원했지요. 6·25 때 용맹을 떨친 해병대 선배들의 전사(戰史)를 수업 중에 들으며 ‘야,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용맹을 떨쳤구나, 멋있다’ 하는 걸 느꼈죠. 1966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그해 6월 미국 수송선을 타고 베트남에 갔어요. 원래는 기초반 교육을 6개월 받아야 하는데, 베트남에서 소대장들이 많이 전사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3개월만 교육을 받고 적진에 투입됐지요.”
●위험한 줄 알고 가셨군요.
“동기들이랑 수송선 안에서 ‘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한 줌의 재가 돼서 돌아올까’ 하고 농담을 했죠. 하지만 각오는 했어요. 전쟁터에 가서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함께 간 동기 15명 중에 3명이 전사했어요. 4명이 부상했고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사나이 하나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장수들은 살려고 마음먹지 마라.” 다음 날 이순신은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330척을 물리치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장의 혼란 속에서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한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2월 15일에도 그랬다. 대한민국 해병 청룡부대(2여단) 11중대는 베트남전의 전략적 요충지 짜빈동(Tra Binh Dong)에서 자신보다 10배의 숫자인 월맹군 연대급 병력의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246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격퇴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해병대’의 신화를 남겼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소위)이었으며, 이후 해병대 2사단장을 지낸 신원배(申元培·63) 장군을 1일 J가 만나 ‘해병정신’을 들어 봤다. 신 장군은 1997년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했으며, 현재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서 그해 곧바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셨죠.
“함께 졸업한 해사 20기 동기 75명 중에 15명이 해병대를 지원했지요. 6·25 때 용맹을 떨친 해병대 선배들의 전사(戰史)를 수업 중에 들으며 ‘야,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용맹을 떨쳤구나, 멋있다’ 하는 걸 느꼈죠. 1966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그해 6월 미국 수송선을 타고 베트남에 갔어요. 원래는 기초반 교육을 6개월 받아야 하는데, 베트남에서 소대장들이 많이 전사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3개월만 교육을 받고 적진에 투입됐지요.”
●위험한 줄 알고 가셨군요.
“동기들이랑 수송선 안에서 ‘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한 줌의 재가 돼서 돌아올까’ 하고 농담을 했죠. 하지만 각오는 했어요. 전쟁터에 가서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함께 간 동기 15명 중에 3명이 전사했어요. 4명이 부상했고요.”
●짜빈동 전투 직전의 전세는 어땠습니까.
“67년 2월 9~12일 72시간 동안의 ‘구정 휴전’을 했어요. 휴전 직후에 짜빈동 전투가 벌어진 거죠. 휴전 기간을 틈타 월맹군 정규군이 120㎜ 포를 끌고 캄보디아·라오스 국경을 넘어 군사분계선인 북위 17도선 인근으로 결집했어요. 그들이 노린 곳은 미 해병대 트라이 비행장이었어요. 당시에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적군은 트라이 비행장이 아주 거추장스러웠던 거죠. 이것을 파괴하러 가는 길목에 바로 우리 11중대 진지가 있었던 거고요.”
●월맹군이 어떻게 쳐들어왔나요.
“15일 새벽 4시10분쯤 월맹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해 왔어요. 조명탄 불빛으로 보니 정말 땅이 새카맣더군요. 말 그대로 파상공격이었어요.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생기듯이 1파가 우리 진지 쪽을 향해 들어오다 넘어지면, 2파가 들어오고, 2파가 넘어지면 3파가 오는 식이었어요. 월맹군 1개 연대 규모가 쳐들어왔으니까 우리보다 숫자가 10배나 되죠. 우리 진지는 둘레 800m 정도의 타원형 모양이었는데, 월맹군에 완전히 둘러싸인 겁니다. 3 소대 쪽이 뚫리는 바람에 월맹군이 우리 진지의 3분의 1을 유린했어요. 우리 소대마저 뚫리면 11중대가 그냥 나가 떨어지는 상황이었죠.”
●그 순간에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우리가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은 상태이긴 했어요. 그래도 전투가 시작되니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주월 한국군 채명신 사령관이 당시 ‘한국군 1개 중대가 전멸한다’는 보고를 받았대요. 우리 중대장인 정경진 대위가 ‘최후의 순간에는 우리 머리 위에 포를 때려달라’고 후방의 여단에 포격 요청을 하겠다 하더라고요. 피아 구분 없이 포를 때리면 다 죽지만, 어쨌든 진지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당시 정경진 중대장과 신원배 1소대장 2명은 전투 직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태극무공훈장은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이다. 중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했다. 미국·월남 대통령까지 부대 표창을 해 왔다. 정경진 대위는 이후 중령으로 예편했다.)
●어떻게 적을 퇴격했나요.
“우리 교통호에서 70m쯤 전방에 가로 8m, 높이 1.2m 정도 되는 큰 바위가 누워 있었어요. 이놈들이 거기 뒤에 57㎜ 직사화기랑, 75㎜ 무반동총을 대놓고서 우리 소대 앞에 계속 사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3소대 쪽으로 지원을 갈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직사화기로 때려봤는데, 바위만 맞고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저랑, 김용길 중사, 이진 병장, 조용화 상병 이렇게 넷이서 특공대를 만들어 철조망 넘어 바위 앞 15m까지 포복으로 접근했어요. 하나 둘 셋 세고 각자 수류탄을 두 발씩 던졌죠. 그렇게 바위 뒤의 진지를 파괴하고, 적의 대전차포 3문을 뺏어 왔지요. 그 뒤 3소대로 가서 역습해 전세를 회복했어요. 그때 적군이 246명 죽고, 아군은 15명 전사했어요.” (소대는 30여 명 규모, 중대는 4개 소대로 구성)
●소대장이 왜 나섰습니까. 지휘관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도 그 질문을 많이 받아요. 월남에서 우리 병사들이 적탄이나 부비트랩을 맞아서 절명할 때를 보면, 힘겹게 호흡하다가 피를 확 토하고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고 저를 찾아요.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엄마!’ 하고 외치다 죽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광경은 못 보겠더라고요. 짜빈동에서 방법은 육탄밖에 없어 보이는데, 육탄으로 가면 죽게 돼 있어요. ‘소대장이 각오하고 간다. 다리나 어디를 맞더라도 가서 수류탄 던질 여력만 되면 나는 끝까지 간다’ 했더니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하며 부하들이 나서더라고요. 남은 부하들한테 ‘엄호사격 해서 우리한테 쟤들이 조준사격만 못하게 하라’ 하고 뛰쳐나갔는데 그게 성공한 거죠.”
“67년 2월 9~12일 72시간 동안의 ‘구정 휴전’을 했어요. 휴전 직후에 짜빈동 전투가 벌어진 거죠. 휴전 기간을 틈타 월맹군 정규군이 120㎜ 포를 끌고 캄보디아·라오스 국경을 넘어 군사분계선인 북위 17도선 인근으로 결집했어요. 그들이 노린 곳은 미 해병대 트라이 비행장이었어요. 당시에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적군은 트라이 비행장이 아주 거추장스러웠던 거죠. 이것을 파괴하러 가는 길목에 바로 우리 11중대 진지가 있었던 거고요.”
●월맹군이 어떻게 쳐들어왔나요.
“15일 새벽 4시10분쯤 월맹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해 왔어요. 조명탄 불빛으로 보니 정말 땅이 새카맣더군요. 말 그대로 파상공격이었어요.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생기듯이 1파가 우리 진지 쪽을 향해 들어오다 넘어지면, 2파가 들어오고, 2파가 넘어지면 3파가 오는 식이었어요. 월맹군 1개 연대 규모가 쳐들어왔으니까 우리보다 숫자가 10배나 되죠. 우리 진지는 둘레 800m 정도의 타원형 모양이었는데, 월맹군에 완전히 둘러싸인 겁니다. 3 소대 쪽이 뚫리는 바람에 월맹군이 우리 진지의 3분의 1을 유린했어요. 우리 소대마저 뚫리면 11중대가 그냥 나가 떨어지는 상황이었죠.”
●그 순간에는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우리가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은 상태이긴 했어요. 그래도 전투가 시작되니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주월 한국군 채명신 사령관이 당시 ‘한국군 1개 중대가 전멸한다’는 보고를 받았대요. 우리 중대장인 정경진 대위가 ‘최후의 순간에는 우리 머리 위에 포를 때려달라’고 후방의 여단에 포격 요청을 하겠다 하더라고요. 피아 구분 없이 포를 때리면 다 죽지만, 어쨌든 진지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당시 정경진 중대장과 신원배 1소대장 2명은 전투 직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태극무공훈장은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이다. 중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했다. 미국·월남 대통령까지 부대 표창을 해 왔다. 정경진 대위는 이후 중령으로 예편했다.)
●어떻게 적을 퇴격했나요.
“우리 교통호에서 70m쯤 전방에 가로 8m, 높이 1.2m 정도 되는 큰 바위가 누워 있었어요. 이놈들이 거기 뒤에 57㎜ 직사화기랑, 75㎜ 무반동총을 대놓고서 우리 소대 앞에 계속 사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3소대 쪽으로 지원을 갈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직사화기로 때려봤는데, 바위만 맞고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저랑, 김용길 중사, 이진 병장, 조용화 상병 이렇게 넷이서 특공대를 만들어 철조망 넘어 바위 앞 15m까지 포복으로 접근했어요. 하나 둘 셋 세고 각자 수류탄을 두 발씩 던졌죠. 그렇게 바위 뒤의 진지를 파괴하고, 적의 대전차포 3문을 뺏어 왔지요. 그 뒤 3소대로 가서 역습해 전세를 회복했어요. 그때 적군이 246명 죽고, 아군은 15명 전사했어요.” (소대는 30여 명 규모, 중대는 4개 소대로 구성)
●소대장이 왜 나섰습니까. 지휘관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도 그 질문을 많이 받아요. 월남에서 우리 병사들이 적탄이나 부비트랩을 맞아서 절명할 때를 보면, 힘겹게 호흡하다가 피를 확 토하고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고 저를 찾아요.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엄마!’ 하고 외치다 죽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광경은 못 보겠더라고요. 짜빈동에서 방법은 육탄밖에 없어 보이는데, 육탄으로 가면 죽게 돼 있어요. ‘소대장이 각오하고 간다. 다리나 어디를 맞더라도 가서 수류탄 던질 여력만 되면 나는 끝까지 간다’ 했더니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하며 부하들이 나서더라고요. 남은 부하들한테 ‘엄호사격 해서 우리한테 쟤들이 조준사격만 못하게 하라’ 하고 뛰쳐나갔는데 그게 성공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