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1968년 그날] ③ 해병학교 출신 최영언이 공군비행 학교 습격에 가담하고 베트남에 파병되기까지
프로펠러가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최영언(25) 중위는 한 손으로 귀를 막고, 또 한 손으로 더플백을 고쳐잡았다. 선글라스를 쓴 미군 조종사가 타라는 손짓을 했다. 뒷문이 스르르 열렸다. 달랑 혼자였다. 내부엔 실탄과 포탄, 시레이션(전투식량)과 물통 등 각종 보급품을 실은 상자가 한가득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쪼그려 앉았다. 헬리콥터는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우기의 비폭탄을 견뎌낸 나무들이 더욱 선명하게 녹색을 드러냈다. 말로만 듣던 정글이었다. 울창한 숲과 곳곳에 박힌 암석은 한국의 강원도 산악지대를 방불케 했다.
일주일만에 도착한 베트남 추라이항
부산항에서 남미 수송함 파레트호를 탄 게 2주 전이었다. 처음 타보는 큰 배였다. 멀미를 못 이긴 병사들은 속을 다 게워냈다. 폭풍까지 만났다. 일본 근해로 잠시 피신하느라, 베트남의 추라이항까지 도착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추라이의 여단본부에서 일주일을 대기했다. 이제 최 중위는 치누크(CH-47) 수송 헬리콥터에 편승해 중대 기지로 가는 길이었다.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진지가 위치한 143고지. 마중을 나온 병사가 심드렁하게 맞았다. “새로 부임하시는 1소대장님이시죠?” 1967년 12월 하순의 어느 한낮이었다.
동기보다 늦었다. 해병학교 입대 1년9개월 만이었다. 같은 중대 2소대장 이상우 중위는 36기로 해병학교 한 기수 후배였다. 3소대장 김기동 중위는 37기. 둘 다 최 중위보다 일찍 왔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아니다. 아예 못 올 뻔했다. 베트남전 파병이 없었다면, 그는 몇몇 동기생과 함께 아직 군 영창 신세를 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부끄럽고, 어쩌면 자랑스러운 기억. 최 중위는 1년4개월 전 기초군사반 교육을 받던 소위 시절을 떠올렸다. 그날, 1966년 8월8일 아침.
퍽!
김해공군비행학교 위병소에서 졸던 헌병이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최영언 소위는 주먹을 맞고 쓰러진 헌병을 일으켜세웠다. 그러곤 옆구리에 꽂혀 있는 권총을 낚아챘다. 전화선을 끊고 전화기도 부쉈다. “조종사 숙소가 어디지? 안내해!” 헌병 2명은 꼼짝없이 무장해제당한 채 포로 신세가 됐다. 최 소위의 뒤엔 80여 명의 진해 해병학교 35기 동기생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또 다른 40여 명은 조금 늦게 버스를 타고 오는 중이었다. 총 128명. 그들은 모두 1966년 3월에 입대해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해, 6월부터 기초군사반 과정에 있는 장교학생들이었다. “돌격!” 해병 소위들은 발을 맞춰 뛰었다. 구보 중엔 군가 <나가자 해병대>와 <청룡은 간다>를 불렀다. 공격 대상은 김해공군비행학교 조종사 숙소. 한국군 장교들이 또 다른 한국군 장교들을 기습하러 달리고 있었다. 전날 벌어진, 어떤 해프닝이 발단이었다.
최영언 소위는 1966년 8월7일 저녁 부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진해행 티켓을 끊었다. 7시20분 막차. 고향인 부산으로 1박2일 외박을 나갔다가 해병학교로 귀대하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과 한잔하며 회포를 풀었다. 내일부턴 다시 빡센 교육이었다. 승강장 앞에서 낯익은 해병 동기들 10여 명을 만났다. 터미널은 북적거렸고, 시외버스는 만원이었다. 김해공군비행학교 장교복을 입은 대여섯 명의 모습도 보였다. 빨간 마후라. 조종사들이었다. 젊은 장교들 사이에 과시적인 경쟁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버스가 흔들리는 와중에 어깨가 부딪혔을까. 공군과 해병 장교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이 일었다가 잦아드는 듯했다. 사달은 버스가 김해비행학교 후문인 덕두 정류장에 섰을 때 발생했다. 공군 장교 1명이 내리면서 해병 장교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뭔가 언짢은 소리를 하는 눈치였다. 그가 비행학교 위병소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저 새끼 잡아!” 해병 장교 1명이 창문으로 잽싸게 뛰어내렸다. 짧지만 강력한 주먹과 발길질 세례. 공군 장교는 뻗었다. 해병 장교는 손을 털고 다시 승차했다.
사상 초유의 해병-공군 집단 난투극
시외버스는 한참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밤길을 달렸다. 사방은 논이었다. 해병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남 창원군 웅동면쯤에서, 갑자기 트럭 두 대가 전조등을 번쩍이고 경적을 울리며 따라왔다. 그중 한 대가 버스를 추월해 앞을 막아섰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공군 장교 수십 명의 눈빛이 번뜩였다. 각자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 몽둥이엔 ‘조준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다 내려!” 공군 장교들은 조준봉으로 유리창을 난타했다.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리창 몇 장이 깨졌다. 진해 여고생 1명이 깨진 유리에 찔려 피를 흘렸다. 해병 장교 2명도 다쳤다. 나가서 싸워봤자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해병 장교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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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2시. 128개의 그림자가 진해 해병학교 철조망 아래를 낮은 포복으로 빠져나갔다. 초소 위병들이 교대하러 간 사이의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해병학교 35기 142명 중 부상자를 제외한 128명 전원이 구보로 인근 경화역에 도착했다. 공군 장교들에게 보복당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전해들은 전체 동기생들이 당직사령 몰래 모의를 한 것이다. “망가진 해병의 위신을 어찌할 것인가. 가만있으면 안 된다.” 결론은 김해공군비행학교 습격. 무장은 않기로 했다. 동기생들 내부에서 지휘체계도 정했다. 중대장 김도삼, 1구대장 OOO, 2구대장 최영언, 3구대장 전도봉(1996년 해병대사령관 역임). 경화역에 집결한 그들은 열차를 타고 김해비행학교 부근인 진영역에 내린 뒤, 다시 버스 3대를 빌려 김해공군비행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다. 아침 5시50분.
“김해공군비행학교장은 해병학교장에게 폭행사건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십시오.” 중대장 김도삼 소위가 뒷버스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2구대장인 최영언 소위가 대신 나섰다. 헌병을 앞세우고 무리지어 2km 거리의 김해공군비행학교 조종사 숙소에 도착한 뒤 당직사령인 이양호 대위(1993년 합참의장에 이어 1994~96년 국방부 장관 역임)에게 겁 없는 요구를 한 것이다. 당직사령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지휘계통에 보고하겠다고만 했다. 주변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치지직’ 무전기 소리가 들리고 연병장에선 사병들에게 전원집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정문으로는 비행학교 간부들의 지프차가 속속 들어왔다. 기상 시간 전에 비행기를 점검하러 나갔던 장교와 사병들이 몰려왔다. 조종사 숙소에서부터 싸움이 벌어졌다. 해병 장교들은 숙소 복도에 비치된 방화삽과 갈고리를 휘둘렀다. 상호 간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200여 명의 공군 사병들이 숙소를 포위해 들어왔다. 일부는 돌멩이를 던졌다. 수에서 밀린 해병 장교들은 활주로 쪽으로 도주했다. 비행기 보호를 위해 공군 사병들이 돌멩이를 던지지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래도 돌멩이는 날아왔다. 최영언 소위는 동기들과 함께 전투기 날개 아래로 피했다. 심지어 해병 장교 중 항공대 출신인 박윤필과 정규호 소위는 시동이 걸린 TS28A형 항공기와 TA858호 항공기를 직접 몰고 몇m 전진하기도 했다.
영창 밖에서 들려온 “힘내십시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최후 탈출의 순간 벌어졌다. 쫓기다가 철조망을 넘고 늪을 헤엄치는 와중에 동기생 이의일 소위가 늪 속 풀에 발이 엉키고 만 것이다. 동기들에 의해 구출돼 공군병원에 후송됐지만 2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군대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른바 ‘8·8 사건’. 한국 해병사는 물론 대한민국 군 역사에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희대의 일이었다. 해병 장교들은 왜 이토록 막무가내로 일을 벌였던 것일까. ‘지면 안 된다.’ 최영언 소위가 교육과정 중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은 절대 지면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8월10일 이 사건에 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해병학교장 이영호 대령이 구속·예편되고 중대장 송재신 대위가 구속됐지만, 분위기는 한껏 관대했다. 최영언 소위는 주모자로 찍혀 동기생 10명과 함께 진해 해군사령부 헌병대 영창에서 45일을 살았다. 군법회의 최종판결은 ‘근신 15일’. 술 먹다 행패 부린 것만도 못했다. 영창에서도 기죽을 일은 없었다. 베트남전 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선배 장교들의 양담배 선물과 위로 방문이 이어졌다. 후배들은 영창 밖에서 응원의 함성을 보내기도 했다. “선배님들 힘내십시오.”
베트남전 때문이었다. 현지에 보낼 젊은 장교가 태부족인 상황에서 이들의 사기를 꺾지 말아야 했다. 1966년 8월은 해병 제2여단과 백마·맹호부대의 파병이 완료된 지 4개월 되던 때였다. 신문과 방송은 날이면 날마다 한국군의 베트남 승전보를 알렸다. 베트남에 갈 간부가 모자라자, 해병대 사령부는 1967년 4월 단기복무장교의 복무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강제 연장할 정도였다. 1967년 5월 이에 불만을 품고 연판장을 돌리던 대위들은 구속됐다. 1년에 한 번 뽑던 해병학교 간부후보생 모집도 2회로 늘어났다. 베트남 파병이 더 중요했다.
다시 1년 뒤 베트남의 정글. 최영언 중위는 추라이의 중대 기지에 도착한 뒤 바짝 긴장했다. 다행히도 별일은 없었다. 소대 단위로 매복을 나가고 정찰을 돌았지만, 적들의 공격은 없었다. 끝물이어서 그랬을까. 그가 속한 해병 제2여단은 한 달도 안 돼 북쪽으로 38km를 올라가 호이안에 주둔하게 된다. 1965년 10월 깜라인만에 상륙한 이후 뚜이호아(1965년 12월~), 추라이(1966년 8월~)에 이어 또 북상하는 해병대의 세 번째 이동이었다.
중대 병력으로 2개 연대를 물리치다
당시 미 해병 제3상륙전 사령부는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20km 아래 지역인 케산의 군사적 대치 상태가 심각하다고 여겼다. 이곳의 통제력을 강화하면서, 그 아래 미 해병대 사령부가 있는 남베트남 제2의 도시 다낭의 안전도 확보해야 했다. 이를 위해선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을 좀더 가까운 곳으로 끌어와야 했다. 때마침 한국군 해병 제2여단도 미 해병대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주둔하길 원했다. 그래야 한-미 연합작전을 통해 좀더 원활한 전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이안으로의 이동은 1967년 12월22일부터 시작됐다. 총이동 병력 4800명. 최영언 중위가 속한 1대대는 가장 늦게 헬리콥터를 타고 떠났다. 1968년 1월28일. 뗏 공세(구정 대공세) 이틀 전이었다.
지면 안 된다. 누구든 까불면 죽는다. 해병 제2여단은 추라이에서 ‘짜빈동 전투의 전설’을 남겼다. 1967년 2월14~15일, 아군 진지를 공격해오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적 2개 연대 병력(2400여 명)을 1개 중대(294명)만으로 물리친 대전과였다. 호이안과 인근 꽝남성에서도 전설을 남길 것인가. 해병은 공군에 져서는 안 되었다. 베트콩에 져서는 더더욱 안 되었다.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