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
보병은 3보이상 구보입니다.
훈련소에서는 행군하는 것 이외에는 걸어다니지를 않았고, 쉴 때도 앉아서 쉬지 못하고 서서 쉬었는데 그래도 진해훈련소 구보의 하이라이트는 천자봉 구보입니다.
천자봉을 진해훈련소에서 보면, 정상에 하얀 글씨로 "해병혼"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이곳 정상에 오르는 천자봉 구보는 훈련소를 수료하기 얼마 전에 했는데 이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M1소총으로 대검을 꽂지 않은 무게가 9.5파운드(4.3킬로그램)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무거운 총을 그나마 "어깨 총"이라도 하고 뛰라면 좀 낫겠는데 "앞에 총" 자세로 몇 시간씩을 뛰니까, 양팔은 늘어지고, 물이 가득 찬 수통은 허리춤에서 덜렁거리고,철모는 화이바가 잘 안 맞아 빙빙 돌면서 한 걸음 뗄때마다 턱턱 머리통을 치고, 힘 들어서 숨은 콱콱 막히고.. 정말 운명할(?) 지경이었지요.
구보가 끝난 뒤에 서로의 얼굴을 보면, 너, 나 할 것없이 흘러내린 땀이 찬바람에 소금으로 변해 얼굴에 하얀 줄이 세로로 몇 가닥씩 줄기줄기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자봉은 일년에 한번씩인가 꼭 불이 난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아! 눈물고개) 저는 훈련소에서 치질이 있어, 어떤 날은 혈변이 무척 심했었는데(지금까지도 지겹게...) 정말 괴로웠습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혈변을 쏟아내니, 가끔가다가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 말이 아닐 지경이었는데 恨 많은 눈물고개를 넘어 상남으로 가던 날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아침부터 죽도록 힘이 들었는데...
완전무장으로 고개를 넘는데, 고개마루를 눈앞에 두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렇게 높은 고개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제 발걸음이 비척거리니까 옆에서 걷던 동기가 부축해주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훔처 먹은 호빵 한 봉지) 진해훈련소에서의 8주간의 기본교육을 마치고, 포항으로 후반기 보병교육을 4주간 받으러 갈 때였습니다. 열차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도중에 '어떤' 역에(당시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어느 역인지 모릅니다) 잠깐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열차가 멈추자, 동기들은 먹을 것들을 사려고 난리였는데 모두들 훈련소에 입소시 맡겨 놓았던 돈을 찾았기 때문에 약간씩의 돈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동기가 차창 밖으로 한 아줌마에게 호빵을 갖다 달라고 하니까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호빵을 한아름 가져다 팔았는데 모두들 그리로 달려가 호빵을 샀습니다.
호빵과 함께 돈이 건네져야 되는데, 빵을 달라고 내민 손이 하도 많아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사람은 '정상적으로' 돈을 주고 호빵을 샀으나, 잠시 후에는 수십명이 두사람에게 서로 자기 빵을 먼저 달라며 아우성을 치는데. 기차는 곧 떠날 것 같지요, 그래도 먹기는 해야겠지요. 참...
그러다보니 돈은 안 내고 빵만 그냥 집어가는 난장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그때 호빵 한줄(다섯개)을 그냥 집어다 먹었는데 돈을 안 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침 열차가 슬슬 움직였거든요.
사실 이 얘기는 부끄러워서 제대 후에도 오랫동안 남에게 말하지 못한 건데, 그 호빵을 팔던 부부도 형편이 좋지는 못했을텐데... 죄송합니다.
혹독한 실무훈련
(실무 일주일만에 동계훈련에 나서다)
저희 264기가 전.후반기 12주 교육을 모두 마치고 실무에 배치 받은 때는 1월말이었는데, 제가 배치 받은 부대는 1사단 *연대 2대대 6중대 3소대로 말단 소총중대에, 소총소대였지요.
부대에 배치 받아 가니, 월남전에 다녀 온 230대 기수가 가장 선임수병(지금은 "해병"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수병"이라고 불렀습니다)이었고, 259기가 말단이었는데 당시는 병력이 많이 부족하여 저희 동기가 5, 6중대에 20여 명씩 떨어졌습니다. 259기가 환장하게 좋아했지요.
1주일쯤 후에 동계****훈련을 나가는데, 제게는 개인화기로 AR이 주어졌습니다. 신참 졸병이라고 가장 무겁고 힘든 화기를 준 거지요.
AR은 월남전에서 쓰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했는데, M1보다도 훨씬 길고 무게는 M1의 두배인 19파운드(8.5킬로그램)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총신 앞부분에 두개의 받침대가 있고, 탄창을 끼워 발사하는 자동소총으로 나중에는 하도 무거워서 완전무장 위, 목에 걸치고 다녔습니다.
경주 토함산 인근 어느 지역으로 훈련을 나갔는데, 하루에 한 두끼니는 K레이션(깡통 속에 밥이 들어 있는데 미군의 C레이션을 본따서 K레이션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으로 받았습니다.
훈련은 주간에는 온종일 걷고, 밤에는 야영을 하고 그랬는데 완전무장 위에 AR을 싣고(?)토함산 어딘가의 눈밭을, 새로 길을 내며 거의 하루 종일 걷는데, 아무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염없이 앞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걸었습니다. 걷다가, 걷다가 배가 고프니까 K레이션을 따서 얼음 덩어리인 맨밥을 몰래 한숟갈씩 입에 넣어 침으로 녹여 먹으며 갔는데 이렇듯 밥을 먼저 먹어버렸으니, 정작 식사시간이 되면 먹을 게 있어야지요? 미치도록 배가 고팠습니다.
혹시 밥을 주는 날에는 녹이 시뻘겋게 슨 알철모에 밥, 국, 김치를 한꺼번에 받아다 서너명이 나눠 먹었는데 고참들은 그것 말고도 다른 먹을 게 있어서 좀 나았지만 제일 졸병인 저는 참으로 배 고프고 서러웠습니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의 행군은 그래도 야영보다 나았습니다. 얼음이 데걱거리는 2월초의 논바닥에,오와 열을 맞춰 3인용 텐트를 치고 잠깐 눈을 붙치는데 텐트바닥에 볏짚 북데기라도 좀 깔게 했으면 나았으련만 그것도 못하게 했습니다.
바닥에 판초 두장과 모포 한장을 깔고, 모포 두장을 가지고 3명이 덮고 자는데 중앙에는 고참이 자고, 그 양쪽에서 졸병들이 잤습니다. 정말 무지하게 추웠습니다. 제 몸에서 모포가 벗겨져도 고참에게서 끌어오질 못하고 그냥 자야 했으니.
추워서 처음에는 발도 안 닦고 하루종일 땀에 절은 양말을 그냥 신고 자니 발이 엄청 시려웠는데, 다음날부터는 얼음을 깨서 발을 씻고 맨발로 자니 발이 화끈거리면서 오히려 더 났더군요. 이렇게 하도 춥다보니까 몸은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데도 깊은 잠이 안 오고 잠깐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하룻밤에도 몇차례씩 다리에 쥐가 나서 잠을 깼는데 심한 날은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5~6일 정도의 훈련 마지막 날, 토함산 중의 어느 고개를 행군해 내려가는데, 산등성이에서 보니까 왼쪽에 얕으막한 고개에서 이어진 신작로가 중앙에 나 있고, 그 옆에 당산나무가 두 세그루 서 있는 작은 마을이 보이더군요. 지금도 그 고갯마루에 서면 그 마을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 한겨울, 그 마을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제 머리를 스친 것은, "아! 저기 가면 밥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전 선임수병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저는 산길을 구르다싶이 뛰어 내려가 다짜고짜 아무 집에나 불쑥 뛰어 들어갔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 밥 좀 달라고 하니까, 주인 아주머니께서 소쿠리에 담긴 식은 보리밥 덩어리와 썰지도 않은 김치를 포기째 내어 주셨는데 세상에, 그보다 더 맛 있는 밥이 또 어디 있을라구요?
그때, 그 아주머니 福 받으소서!! -3부 끝_
*옮긴 이註)'선임들이 "환장하게" 좋아했다'는 대목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263기선임들께서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 사령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그 후 약 6개월간 신병이 진해훈련소에도 안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언젠가 263기 장석융 선배님이 올리신 글 중에 "상남을 다녀 오는데도 다른 기수들처럼 길 양편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 주는 후배들이 없어 몹시 우울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실무에도 그 기간 동안엔 "보급물"들이 안 올라온 거구요. 그러니 가히 "환장할 만"하지요?
그리고 본문 중의 "어깨 총"은 "우로 어깨 걸어,총"일 겁니다. 제 생각엔....
박동규(264기)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