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김정식씨, ‘남돕는 일은 이미 일상’

by 운영자 posted Dec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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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해병대 제대 후 칼과 도장나무를 들고 오로지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하기 위해 연평도, 백령도 등지로 이곳저곳 다녔던 기억은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이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당시의 일이 시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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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식씨가 평생모은 수석 전시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데일리안 안병희

 

그때마다 홀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여주군 여주읍내 군민회관 옆에 사무실을 내고 일년 365일 봉사활동을 위해 근무하고 있는 6.25참전전우회 여주군 지회 김정식 회장(78). 

 

해병 출신인 김 회장 가족은 3대가 해병을 제대했다. 두 아들이 해병을 다녀왔고 김 회장의 손자 둘이 또 해병 출신으로 해병가족 중 이렇게 군복무를 마친 일은 전례가 없다. 

 

여주읍 중앙통 시장에서 ‘홍콩안경’이라는 안경점을 아들과 함께 운영하며 여생을 활기찬 자원봉사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에게 ‘남을 돕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매우 가난한 삶 속에서 평생 먹고살 정도의 경제적 여력을 10년 만에 마련했다”고 말하는 김 회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나온다.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이제 고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 자원봉사와 사회에 기여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낀다고 전한다.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면 회한도 많고 심지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았지만, 어둠의 긴 터널을 굳센 의지로 헤쳐 나온 제 자신을 생각해 보면 가슴 벅찬 기쁨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며 감회에 젖는다. 

 

5.16혁명 이후 여주로 들어와 모진 풍파를 이기며 살아야만 했던 김 회장은 여주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심하게 되는데, 그 열쇠는 서민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 수 있는 서민금융이었다고 말한다.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여주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3,4,5대에 걸쳐 맡으면서 여주 서민금융을 강화시켰다. 

 

한때 반대파에 의해 일시 밀려났다가 신협이 위기에 처하자 지지자들에 의해 다시 복귀, 서민경제의 터전을 다시 회복시켰던 일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하다. 

김 회장은 다양한 경험을 했고, 여러 사람들도 만났다. 그 중에서 여주대학 설립자인 정동성 박사를 보필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또한 인천과 수원에서 정당 활동을 펼친 경험, 여주에서 40대 초반에 마을이장을 맡은 일, 나이 60세가 넘어서도 반장을 하면서 주민들과 지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이제 그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순간들을 지나서 평온한 마음으로 매일같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5.16혁명 이후 여주로 이전해 와 잠시 머물려고 했던 것이 그를 평생 여주사람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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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일리안 안병희

 

그의 삶의 흔적은 여주박물관의 남한강수석전시실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으며, 남한강을 사랑하며 57년간 수집한 수석은 무려 1000여점이 넘는다. 

이들 수석 중 일부를 여주 박물관에 기증해 ‘남한강수석전시실’을 꾸몄고 수석전시실에는 150여점이 전시돼 있다. 

 

그의 취미는 수집으로 모은 우표가 8000장이 넘고 각종 연하장과 수석메달, 라이터, 양주병 등 평생을 수집을 하면서 인생의 여유를 즐겨왔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아주 짧은 생각이지요.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고 자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어요. 그러나 박물관에 기증하면 제가 죽어서도 100년, 200년 아니 천년이상 ‘김정식 이라는 사람이 멋진 수석을 기증했구나!’라는 찬사 속에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78세의 나이에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조차 인격과 존중을 생각해 반말을 하지 않는 김정식씨의 절제된 생활은 이제 그 소중한 물품들이 여주박물관에 기증되면서 그 가치와 품격이 더욱 고상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