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367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제목 없음.jpg

해간35기 구문굉님

 

 

과거 해군 서울지구 헌병대는 서울에 사는 왼 만한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업은행 본점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고 옆으로는 남산 2호 터널이 뚫려 있어 그렇지, 옛날에는 남산 2호 터널도 생기지 않았고 바로 그 자리에 벨기인들이 지은 붉은 2층 벽돌집이 위엄 있게 버티고 있는데다 또 그 건물에 들어가는 중앙에 큰 고복이 한 그루 있어 매우 이색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설치고 있는 우리 해병대 헌병들의 복장과 백차는 실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 요귀로도 충분할 수 있었고 더구나 위치가 바로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의 뒤편에다 또 남대문 시장을 가고 오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기 때문에 더욱 알려져 있었다.

 

 

또 역사적으로는 왜정 때 그 건물이 바로 일본 헌병들이 썼던 건물이라 3.1 독립 운동 때는 유관순 누나가 바로 그 곳에서 고초를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잇었다. 물론 지금은 그 유물을 잘 보존하느라 다른 곳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바로 그 장소를 가 볼 기회는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은 그 건물은 헌병감실이 단독으로 썼을 뿐이었고 또 헌병감실이 대방동으로 떠난 후로도 서울지구 헌병대는 공실로 비워둔 그 건물을 매일 바라보고만 살았다.

서울지구 헌병대는 불쌍하게도 끝내 그 내부 담벼락 옆에 세운 반원형의 큰 콘세트 안에서만 업무를 했고 또 건물 뒤쪽의 부속 건물은 헌병대장실과 우리 헌병들의 내무실, 식당 그리고 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해병대 야구단의 숙소로만 정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헌병 대장은 중령이 하게 되어있었으나 해간 18기의 진 소령께서 보직을 맡아 하셨고 보좌관으로는 바로 해사 14기의 윤춘웅(미국서 작고) 대위셨고 나도 대위로써 보안 과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우리 서울지구 헌병대의 바운다리는 서울지역과 경기도 그리고 충북이었다.

충북의 어느 시골에서 문제가 생겨도 현장을 가기가 너무 멀고 귀찮고 연천이나 동두천쯤에서 사고가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른 들어 놀라운 것은 고참 상사만 자그마치 7명이 있었다.

 

 

당시 직책으로만 보면:

 

박순재상사: 보안계장. 해병 헌병의 최고참으로 월남서도 함께 근무.(작고)

이종진상사: 해군 조사계장.

장만성상사: 보안 및 행사 담당.

고상사 : 보안 맟 행사담당.

홍문표상사: 영등포 파견 대장 및 해군 교도소장.(작고)

김상사 : 해병 교도소장.

하상사 : 수송반장.

 

 

근무 대상 중요 지역을 보면:

 

1.후암동 해병대사령부.

2.후암동 해병교도소.

3.대방동 해군본부.

4.대방동 해군교도소.

5.한남동 4개공관(국방부 장관. 육참총장. 해군 참모 총장. 해병대 사령관).

6.중지도 합동검문소.

7.용산역.

8.합동순찰대(육해공군.경찰).

 

 

이 모든 곳을 40명 정도의 인원으로 배치를 하고 근무를 통제해야 하는가 하면 항상 청와대. 국방부. 사령부. 해군 본부. 합참. 육본. 미 8군과 관련해 에스코트는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 실로 중책이 아닐 수 없었고 국군의 날 행사에는 내가 2년간을 연속 육해공군 헌병 중대장으로 여의도에 나가 맨 앞 백차 네 대와 후미의 백차 네 대가 앞으로 움직일 때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오와 열을 맞추게 하는 훈련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김포 여단으로 넘어 오다 우리 해병대에 잡힌 간첩은 인민군 현역 중위였다.

결국 사형을 시키는 날은 닥아 오고 나는 침울 했다. 헌병 대장이 나를 집행관을 시키면 영락없이 해야 하는 입장이고 또 확인관을 시키면 집행 후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권총을 뽑아 관자노리에다 총을 쏘아 끝을 맺어야 하는 입장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나름대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의 경험도 있는데 그까짓 거 하라면 못하랴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사실은 내 집 사람이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여서 너무 망서림이 컸었다.

 

 

당시 헌병 대장 진 소령은 해병대에서도 독특한 분이셨다. 6.25때 사병으로 그리고 하사관으로 그리고 또 해간으로 임관을 하신데다 위관 때는 그 유명하셨던 남상휘 (작고)장군의 부관을 하셨고 또 붓글씨가 명필인데다 영어를 하도 잘해 사실은 6.25가 원수지 엄청 크게 될 수도 있었던 분이셨다.

 

미리 내 심경을 읽었는지 집행 이틀 전 헌병 대장실로부터 “구 대위는 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는 윤춘웅 선배께서 내게 다가와 “구 대위는 헌병대나 잘 지켜”하는 말을 해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우리가 쓰던 회현동의 자리에 파견대만 두고 해군 본부 안으로 모두 이사를 했다.

그 동안 헌병 대장 진 소령께서는 월남으로 가셨고 해사 14기 윤춘웅 선배는 광주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교육을 가셨다.

그리고 공석인 헌병 대장은 포항 상륙 사단에 계시던 해간 8기 기갑장교 이병준 중령께서 오셨다. 또 고맙게도 해간 36기인 이상우 대위가 순찰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

 

 

어느 이른 여름날, 정오가 마악 지난 시간에 엠블란스의 사이렌 소리가 해군본부 연병장 쪽에서 났다. 그리고는 왼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스러워 바깥으로 나가보니 무슨 변고가 나도 크게 난 것 같았다. 전령이 뛰어와 감실에서 온 전화를 빨리 받아 보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대충의 내용을 감실 수사과로부터 듣고는 화를 버럭 냈다.

 

“야이 X헐 개 새끼들, 나가자빠져 있네. 그렇게 큰일을 이제 헬리콥터가 와서야 우리한테 알려주냐?”

*************************

 

 

남이 나를 그렇게 보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나름대로 좀 건방진 데가 있어 그런지 해병대나 해군의 고참 수사관들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조서를 보면 군형법이나 형법의 구성 요건을 잘 모르고 조서를 쓰는 수가 있는가 하면 꼭 왜정 시대처럼 쓰지도 않는 말들을 자주 썼기 때문이었다.

 

“연(然)이나.. 우(右) 수권(手拳)으로 상대의 좌측(左側) 안면(顔面)을 2회 강타(强打)후 전도(顚到)케 하였으며....”

 

내가 결재를 할 때는 “이거 고치지요. 오늘 쪽 주먹으로 상대의 왼편 얼굴을 두 차례 때려 넘어지게 하였으며,,, 라고하면 안 돼요? 또 연(然)이나 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는데 빼는데 낫겠어요”  

결재를 받으러 온 나보다 나이 많은 수사관이나 조사관들은 마치 그런 문구를 써야 의당 조서가 되는 것처럼 잘못 배웠기 때문에 언제나 서먹하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들은 얘기가 있어 “견타식(犬打式) 구타(救打)가 뭔지 알아요? 그게 바로 개패듯이 팼다는 말이라는데...”

 

 

내가 제대를 하는 날. 해군과 해병대의 헌병 그리고 보안대 요원들까지 모두 합쳐 16명이 모 정보기관에 경쟁시험을 치러 갔다. 제한은 계급이 중사부터 소령까지였고 육해공군 경찰의 현역이나 예비역들이 거의 2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연(然)이나 ㅋ... 시험은 거의 하루 종일이 걸리다시피 했는데 제일 큰 고비는 사건을 하나 주고 네 시간 이내 모든 조서 작성을 하라는 것이었다.

즉 정보 또는 인지 보고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의견서까지 써야 했고 특히 증거물들은 요령에 의해 표시를 해야 하는 경우였다. 그야말로 실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꼭 같은 시험을 쳤던 것이다.

연(然)이나 ㅋㅋ... 그 결과는 창피스럽게도 나와 헌병감실에서 맨 날 찬밥 신세였던 해군 중사 한 사람 밖에는 합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결국 연병장에 헌병들을 빨리 배치하고 내가 앰블런스를 뒤따라 바로 해군본부와 붙어있다 시피한 해군 병원으로 달려갔다. 총에 맞아 죽은 시신들은 그렇다 치고 총을 쏜 피의자가 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바로 그 피의자를 감시하는 것이 우리 헌병들의 임무였다.

 

인천에서 조금 떨어진 무인도에서 해군과 해병대 1개 분대가 TV 찬넬을 문제로 삼아 매일 시비를 하다가 분개한 해병대 하사관 한명이 해군들이 있는 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고 M-16으로 난사를 해 버렸던 것이다. 월남전에서 돌아 온 그 하사관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날 다시 병원에 들린 나는 피의자가 침대에 누워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좀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청룡부대 헌병대에 계실 때 보았다고 해 너무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그런대로 사소한 일은 자주 벌어져도 별로 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퇴근을 해 집에 있는데 난데없이 교도소에서 탈옥수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운전병이 몰고 온 차로 대방동으로 향했다.

벌써 당번을 서던 헌병이 대신 닭장에 들어가 있었고 탈옥의 내용은 슬슬 옆에서 다른 죄수가 말을 붙이는 사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헌병의 열쇠를 슬쩍 했던 모양이었다.

모두 추적을 위한 업무 분담을 했다.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 혹시라도 통행금지로 경찰서 유치장에 묻어 들어 와 있지는 않은지? 또 사창가에 숨어들어 있지는 않은지? 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는데 결국 우리는 당일 요행스럽게도 청량리 588에서 탈옥수를 검거할 수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도 가, 해사 14기 윤춘웅 선배는 교육을 마치고 원대 복귀를 하셨고 이병준 대장께서는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이 보였다.

이병준 대장께서는 일찍이 수륙 양용차 교육을 미국으로 건너가 미 해병대로부터 받고 오셨기 때문인지 멋쟁이에다 키는 작으셔도 인물이 좋으셨다.

 

자신이 진해 헌병 대장으로 있었을 때의 얘기로 미스 코리아와의 염문을 얘기하면 정말 실감이 날 정도로 묘사를 잘 해 나는 개면적어 웃기만 했다.

또 시간만 있으면 나를 붙들고 장기를 두자고 하셨는데 아마 유단자쯤은 되지 않나 싶은 실력이셨다.

그러나 하늘은 다는 주지 않는지 이미 간이 말이 아닐 정도로 나쁘셨고 그런데다 내 제대 기념 파티를 열어주시면서 너무 술이 과하셨던지 귀가하시다 차를 돌려 병원으로 바로 직행을 하셨는데도 그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가 1971년 1월이었고 나는 1971년 2월 1일에 제대를 했다.

 

대장님. 저가 잘 보필해 드리지 못한 죄인입니다.  삼가 대장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 끝 **

 


  1. 해병대 헌병대 - 구문굉

    해간35기 구문굉님 과거 해군 서울지구 헌병대는 서울에 사는 왼 만한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업은행 본점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고 옆으로는 남산 2호 터널이 뚫려 있어 그렇지, 옛날에는 남산 2호 터널도 생기지 않았고 바로 그 자리에 벨기인들이 지은 붉은 2층 벽돌집이 위엄 있게 버티고 있는...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13676
    Read More
  2. 1968 내가 만난 미 해병대 전우들 - 구문굉

    1. 나와 미 해병대원과의 첫 만남. 내가 개인적으로 미 해병대 장사병들과 처음 만났던 일들과 서로 교분이나 의기투합을 했던 일들을 상기해 보면 나의 경우 꽤 여러 미 해병들과 접촉을 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사실 나는 월남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각 보병중대에 두 명의 미 해병대 앵그리코맨이 파견 되어 있는 줄은 미...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5847
    Read More
  3. 곽해병의 해묵은 일기

    곽해병의 해묵은 일기 그시절 주월 한국군에게 고국으로 부터 오는 위문단은 삭막한 열대의 베트남 이국 전선의 한국군들 한테는 군생활의 활역소가 되었다고 하면 그 누가 이유달 사람 없으리라! 대개 고국에서 오는 그런 주월 한국군 위문단은 3등급으로 나눌수 있다. 1등급은 완전 잘나가는 일류 스타급 연예인 들이다. 2...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3306
    Read More
  4. 잊혀진 해병대 내무생활 기억 - 영원해병

    잊혀진 해병대 내무생활 기억 - 영원해병 얌마! 박수병! 너 근무 나가! 오대 장성중의 하나인 "해병병장 고참병장 제대말년 병장 열외병장 양수병이 박수병 한테 명령했다. 때론 근무에 관한한 지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양수병이 쫄따구 박수병 한테 근무 나가라 마라 할 자격이 없는데, 가끔이면 지 맘대로 제대말년 고참수...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11495
    Read More
  5. 연평도로 날아간 국회 국방위의원들

    해병대 6여단은 적은 병력으로 백령도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개 섬에 배치되어 서해 북방을 책임지는 한편수도권 2천만을 지키는 주요한 위치에 도사리고 북한의 도발을 응징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요즈음 북한의 태도는 한나라의 국가이기를 거부한 지구상에서 유일한 이단자의 길을 걷고 있다. 2차례의 핵실험...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3520
    Read More
  6.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 펌

    In memory of my fallen comrade of 2nd ROK Marines Brigade (Blue Dragon), Whom my unit served with was part of. Park--Kim--Lee, and many others whose names I'll never know. But, I'll never forget. Sub Unit One, 1st ANGLICO, USMC." "나와 같이 소속되어서 싸웠던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의 내 전우들을 추...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3335
    Read More
  7. 귀국

    ★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오시는 어느 해병대 선배님의 수기중 귀국부분입니다. 배가 다낭항을 출발하고 몇 시간 후부터 다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멀미는 작년 월남에 올 때 보다도 더 심했다. 일년이 넘는 월남 생활에 심신이 많이 망가졌나보다....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4230
    Read More
  8. 쏟아지는 총탄에 멈춘 기관차… 장단역 시간도 거기서 멈췄다

    밀려드는 중공군 목숨바쳐 막아낸 해병대 776명 젊음도 함께 흘러 1000여 개의 총탄 자국, 무참히 일그러진 바퀴… 22일 오전 경기 파주시 임진강 통일대교 앞. 육군 제1사단의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검문소를 지나며 임진강 왼쪽 자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었다. 1950년 12월 31...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3732
    Read More
  9. No Image

    다시 보고싶은 22대대장 박호철 대대장님

    다시 보고싶은 22대대장 박호철 대대장님 - 해병대CD中에서 하교214기 이동원 긴 훈련소 생활 6개월을 마치고 실무부대에 처음 왔을때우리 부대는 난리가 났었다. 1992년 0월, 000지역으로 상륙기습훈련을 위해 해상이동을 하던 0중대가 소용돌이를 만나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소용돌이에 휩쓸린 해병대원 2명이 파도에 휩...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17696
    Read More
  10. No Image

    해병대의 여전사들!

    해병대 4기 해병공수 123차 첫 자격강하를 마치고 공수교육동기들과 철모에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 해병대 여군장교 1호 한경아대위 1사단 71대대 소대장 한진영 소위(2중대 2소대장)가 소대원과 함께 암벽 레펠을 하고 있다. 해병대 최초의 해외파병 여군 허정은(28세, 사후98기)대위 헌병대 여군장교 이수연 소위(해군사관...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6277
    Read More
  11.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 - 이영주 해병준장

    이영주 해병준장 우리는 평소 드라마나 스포츠를 즐겨본다. 여기에 극적인 변화나 반전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세상사 역시 반전의 묘미가 있어 더욱 살맛 나는지 모른다. 70년대 고교야구는 프로 스포츠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요소 중 하나가 역전승이었다. 그것도 9회 말 투 아웃에 펼쳐지는 역전...
    Date2010.05.25 By운영자 Views3325
    Read More
  12. 이사진을 기억하나요?

    그때 그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사진을 들고 노무현대통령을 조문한 해병중위입니다.
    Date2010.05.24 By운영자 Views4479
    Read More
  13. 천자봉구보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 보병은 3보이상 구보입니다. 훈련소에서는 행군하는 것 이외에는 걸어다니지를 않았고, 쉴 때도 앉아서 쉬지 못하고 서서 쉬었는데 그래도 진해훈련소 구보의 하이라이트는 천자봉 구보입니다. 천자봉을 진해훈련소에서 보면, 정상에 하얀 글씨로 "해병혼"이라고 표시되어 ...
    Date2010.05.24 By운영자 Views4439
    Read More
  14. 스무살 새로운 도전

    1사단 포병연대 일병 황인성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나는 5월이 되어 어느덧 일병으로 진급을 하고 내 나이도 만 20살이 넘어 드디어 성년이 되었다. 성년의 날... 장미, 향수, 그리고 달콤한 키스를 연인에게 주는 날. 이제 진정으로 성인이 되는 사람에게 축하와 격려를 해주는 날이다. 하지만, ...
    Date2010.05.20 By운영자 Views2994
    Read More
  15.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해병대라는 것

    2사단 본부대대 상병 김성철 (2007) 저는1985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운이 좋게도 미국 국적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외가 친척들이 어려서부터 미국에 이민을 가서 저 또한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귀국한 후 한국...
    Date2010.05.20 By운영자 Views3359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Next
/ 2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