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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

10만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흥남철수작전의 두 영웅

포니대령과 현봉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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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 포니 대령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57년 내가 사령부 참모부장이던 시절에 수석고문으로서 함께 일해 당시 인원(T/O)과 장비(T/E) 등 해병대의 기반을 수립했다. 내가 만난 포니 대령은 우리 해병을 너무나 사랑했고 오늘날의 해병대가 있게 한 은인이다. 그는 우리 해병대에게 ‘포항(浦項)기지’라는 큰 선물을 남겨주어 지금까지 세계 최고 최상의 상륙전 모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
50년 흥남철수작전 때 미 10군단 참모부장겸 탑재참모였던 포니 대령은 피난민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한국전쟁이 끝난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사령부 수석고문으로 2년 동안 많은 일을 한 그는 귀국해 장군으로 전역하였으며 1965년 사망했다.
2005년 5월 거제도에서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에 애드워드 포니 대령과 알몬드장군의 손자들과 현봉학 씨도 참석해 더욱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다. 그의 증손자 벤 포니(Ben Forney, 24세)가 지금 전남 목포시 영흥중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09년 7월 대학을 졸업하자 한미교육위원단에 한국 교사지원을 했다. 벤 포니는 어릴 때는 증조부에 대해 전혀 몰랐다. 회계사였던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포니(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음, 74세)는 아들 네드(Ned)와 손자 벤(Ben)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벤 포니는 “아마도 해병대 장교였던 증조부가 참전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벤 포니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증조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역사 교사인 그의 아버지 네드 포니가 1990년대 중반에 교원연수 프로그램으로 3주간 한국에 왔을 때, 해병대 통역관으로 흥남철수작전에서 증조부와 함께 일했던 현봉학 씨로부터 “포니 대령의 손자냐?”라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손자(네드)와 증손자(벤)는 그렇게 포니대령의 미담을 알게 됐다. 2000년 미국을 방문한 현 박사와 포니 장군의 후손들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포니 묘역을 찾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그 뒤 현 박사가 ’07년세상을 뜬 뒤에도 양 가족의 ‘대(代)를 이은 우정’은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도하 일간지에 벤 포니가 그의 증조부가 구출했던 흥남철수의 피난민들과 기막힌 상봉을 하는 소식이 소개돼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한국의 모세’ 현봉학 해병대 통역관
또 한사람은 ‘한국판 모세’ 현봉학(玄鳳學)박사다.

그는 내 해사 동기생 현시학 제독의 형님이다. 흥남철수 때 10만여 명의 피난민후송에 큰 역할을 해 붙여진 별명이다.
그가 진동리전투의 김성은 부대장 통역관이 된 것은 순전히 강압이었다. 미 25사단장 킨(Kean) 장군 통역관으로 부임하던 그를 해병대 백남표 소령이 붙잡아 왔다. 통역이 없던 김성은 부대장을 위해 백 소령이 현 씨가 통역요원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현 박사는 미국 리치먼드의 버지니아 주립의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 세브란스의대에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한 그는 전쟁이나자 자신이 터득한 영어로 조국에 봉사할 길을 찾던 중 황성수(黃聖秀) 국회부의장 소개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신 장관은 이 기특한 청년을 통역관으로 미 25사단장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장관추천서를 주어 현지에 부임시키던 상태였다.
그렇게 김성은 부대로 온 현봉학 씨는 해병대장비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김성은 부대장은 그가 현시학 해군 소령의 친형이라는 사실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그에게 오랜 숙원을 설명했다. 미 25사단에 가서 신형 BAR자동소총  및 병기와 탄약 등 군수품을 확보해 오라는 부탁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현 씨는 현금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든 장교 한 명과 부대를 나섰고 하루 뒤에는 많은 BAR 등 병기와 탄약과 군수품 수십 상자를 트럭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현봉학 박사는 1950년 11월 해병대사령부가 강원도 고성 지구의 고저에 주둔하고 있을때, 참모장 김성은 대령 때문에 해병대에 다시 종군했다. 거기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만난 현 씨가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의대에서 공부했다는 말에, 군단장이 깜짝 놀라며 “내 고향도 바로 버지니아주의 루레이(Luray)”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알몬드 장군은 한국 해병대 통역관이던 그를 신현준 사령관에게 간청하여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 하였다.
현 박사의 고향인 함흥은 당시 중공군 포위망에 갇혀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미 해병1사단과 한국 해병대,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 미 육군3사단과 7사단 등 군 병력만 10만여 명이 되었다. 거기에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둣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공산당 색출에 도움을 준 이들은 적치(敵治)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복을 당할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찾아와 애타게 매달리는 고향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민사고문 현봉학 씨는 애끓는 심정으로 알몬드 군단장에게 건의했으나 여건은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가 뜻밖에 해결되었다.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대 포니 대령은 현 씨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함정탑재(搭載)의 기술적 대안(代案)을 제시해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싣고 떠나려는 현 씨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떠날 시간이 임박하자 그는 빠진 사람을 살피려 시내로 들어갔다. 미국 신부와 함께 경찰서 유치장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피난민 30여 명을 트럭에 태우고 아슬아슬하게 배를 탔다. 구출된 피난민들은 현 씨를 ‘한국의 모세’라고 불렀다.
또 다른 별명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현봉학 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욱정출신으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버지니아 의대를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은 저명한 혈액병리학자다. 그가 아주대학에 있을 때 신현준 초대사령관의 부인함혜룡 여사가 치료를 받은 인연이 있다.
지난 ’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형제로 맏형은 이대 문과대학장을 지낸 현영학 교수, 두 동생은 문필가 피터 현과 내 해사 동기생 현시학 제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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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로(Forney 路)’ 명명식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하는 현봉학과 포니와 같은 사람들은 진정한 휴머니스트(Humanist)로 칭송 받을 만하다.
이들 중에 특히 포니 대령은 내 좋은 친구였다. 이번에 포니의 유족들인 그의 아들 에드워드 포니(Edward W. Forney)와 부인 유본 포니(Yvonne M. Forney) 그리고 증손자 벤포니(Ben E. Forney)가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반가웠다.
나는 포니 대령께서 한국 해병대에 기여한 공적에 보답하는 뜻으로 포항 해병대 제1사단에 연락하여 ‘포니 로(Forney Road 路)’ 명명식을 가짐으로써 이 분을 우리 해병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행사를 주관한 1사단장 이영주 소장은 2010년 11월 4일 명명식을 통해 누란의 위기에서 피란민들을 구한 그의 애민정신을 기리고 해병대1사단 주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포니 대령의 한국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 또한 회고사에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애드워드 포니 대령이 흥남철수작전에서 수많은 피란민의 생명을 구하고, 당시 포항에 있던 미 해병대 3항공사단 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물려 받아 전략의 맥을 이어 가야 한다’고 건의해 해병대 1사단이 포항 주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으며, 정전 후에도 2년간 한국 해병대 수석 군사고문관으로 근무하면서 해병대 교육에 관심을 갖고 인재 양성에 헌신한 그의 삶을 회상하며 공적을 기렸다.
이날 명명식에서 유족들에게 감사패가 전달되었고, 기념석(記念石) 문구에는 포니 대령께서 우리 해병대를 포항기지에 주둔하도록 한 업적도 기록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처럼 흥남철수작전에서 보인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의 피난민 구출이라는 박애(博愛)정신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가슴에 남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흥남대탈출작전을 이렇게 썼다.
“10만여 명의 군 병력과 9만 8천여 명의 피난민, 1만 7천여 대의 차량과 수십만 톤의 화물을 철수시킨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군사적 승리였다.”  <해병대지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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