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한국인이다” 조선의 칠장이 전용복
해병대가 낳은 세계적 예술가.
옻칠로 세계를 감동시킨 예술가의 꿈과 집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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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얘기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백 번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을 거요. 불가능하다고 한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 줄 압니까? 그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고 나는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오.”
그는 목숨을 걸었다. 일본 최고의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위해 숱한 조선의 장인들이 나라 잃은 울분을 삭이며 피와 땀을 흘렸으리라. 그 선배 장인들의 넋을 기리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3,000명에 달하는 일본 최고의 옻칠 장인들과의 경쟁 끝에 복원 공사를 맡게 되었다. 연 인원 10만 명, 최소 비용 1조원으로 추산된 방대한 작업. 조선의 칠장이 전용복은 한국에서 데려간 장인 300명과 함께 3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해내는데 성공한다.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의 개관일. 입구의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누군가 외친 만세소리에 모두가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3년간의 작업으로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벗겨진 살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은 웃고 또 울고 있었다.
60년 전 조선의 이름 모를 장인들이 그 곳에서 느꼈을 그 감격을 그 후예들인 대한민국의 칠장이들이 느끼고 있었다.
칠장이 전용복. 그의 기술과 예술성에 탄복한 일본이 끊임없이 귀화요청을 해왔지만 ‘조선의 옻칠’을 지키겠다는 결의 하나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그러한 그의 철학과 신조에는 해병대에서의 기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듯 했다.
전쟁 통에 2년 늦게 출생신고를 한 그가 어린 나이에 해병대를 선택한 것은 실제 자기 또래들과 같이 군 생활을 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73년 7월 해병263기로 입대한 그가 첫 배치를 받은 곳은 김포의 한 강상초소였다.
“북한에서 향수를 일으키는 노래를 틀어놓고, 이북으로 넘어오면 영웅이 된다는 심리방송을 해요. 그럼 우리는 개소리 하지 말라고 생각하지.(웃음) 국가가 있고 따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속되어 있는 것이 우리고 곧 국가라는 깨달음. 그런 경험과 생각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내 삶에 반영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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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으로 차출되어 제주도로 내려간 것은 181cm에 달하는 훤칠한 키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전방을 지키는 보병에서 엄격한 규율의 헌병 생활까지. 그의 기억 속 해병대는 역시나 호락호락한 곳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은 그가 23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풍파를 헤치는 힘이 되었다.
“시련을 겪을 때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가 그리워지고 거기서 힘을 얻는 것이 인간이예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해병대라는 가장 강한 군대에서 젊은 시절 2~3년의 인생을 던질 수 있는 정신력을 배웠다는 것은, 명문대학을 10번을 나와도 얻을 수 없는 재산이죠.”

 

모진 바람을 이겨낸 꽃이 더욱 아름답다. 그를 키워준 그 기억은 비단 해병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궈낸 성공이 광복 후 물거품이 돼버린 탓에 술에 삶을 빠뜨려버린 아버지와 갑작스러운 장남(전용복의 형)의 죽음에 정신적인 장애까지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과일과 국화빵을 팔고, 연탄을 배달해야 했던 그였다.
rokmc37_022.jpg“그 열악한 환경이 인생을 더 바르게 살게끔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어요. 오히려 우리 부모님께 감사해요. 어떠한 풍랑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모진 교육을 시킨 것이 아닌가. 그 교육이 없었던들 내가 있을 수 있었나 싶어요.”
어려운 가정환경에 과일바구니와 연탄을 들춰 메야 했던 어린 가장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예술가의 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화가인 외삼촌들의 어깨너머로 보던 그림은 그에게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주었다. 동네 어귀 나전칠기 가구를 만드는 기술자들의 단순 작업은 ‘더 예술적으로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해병대를 전역하고 목재회사에 입사한 것은 어릴 적 구상이 실현되는 통로가 돼주었다. 한 번 하면 끈질기게 해내는 그의 성격은 젊은 나이에 꽤나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1978년 당시의 그의 월급은 57만 원이었다. 1종 고용직 공무원의 월급이 4만 4천 원을 밑돌던 시절이었다. 27살 나이에 회사에서 차와 기사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전용복 스타일의 가구를 만들어 보겠노라는 열망이 커져만 갔다. 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 낸 뒤 차린 예린공예사. 그가 디자인한 가구들은 신선했고 세련됐다. 매번새로운 작품을 만들기가 무섭게 최고의 가구매장에서 사들이기가 바빴다. 가구를 만들며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던 그의 눈을 붙잡은 것은 도자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 이었다. 독학으로 1,200년 전의 기술을 깨우쳐가며 그는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은 얘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일본 내에서는 수선하기가 힘든 오젠이라는 밥상을 저에게 가져왔어요. 처음에는 손상된 부분만 수리하여 내밀었는데, 새것처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 오젠을 깔끔한 새 밥상으로 만든 것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죠.”
그 밥상 하나에 만족한 일본인은 밥상 1,000개를 수리해주라는 의뢰를 한다. 중국집의 밥상 정도로만 알았던 오젠은 일본 최대의 문화재급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의 밥상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으로 진출한 그는 곧 메구로가조엔을 철거하여 복원하게 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접한다. 물론 가정이었다. 이를 철거하여 아파트나 빌딩을 짓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들이 복원을 해야 한다면이라는 상상을 한 거죠. 그 당시 내 실력으론 당연히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몇 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준비를 하면 건물을 복원할 때 내가 참여를 할 가능성이 있겠구나. 물론 미비한 가능성이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33살의 나이에 대학교 일어과에 진학하고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며 일본과 한국의 옻칠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못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형편. 신칸센을 무임승차하는가 하면 역사나 공원에서의 노숙도 허다했다. “메구로가조엔은 복원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할 것이다.” 라는 믿음을 주위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1988년 메구로가조엔은 복원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오젠’을 수리했던 한국의 칠장이를 기억한 메구로가조엔 경영주의 제안.

 

관심 있으면 한 번 오기나 해보라는 투였지만 그들은 2년간 인간전용복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2년간 메구로가조엔의 복원만을 연구해온 그의 도박에 운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내로라하는 일본 장인들이 다녀간 뒤 전용복 선생이 메구로가조엔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새파란 장인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본인들에게 2년의 연구결과와 그 속의 한과 땀을 다 쏟아냈다. 현장에서 작품의 복원 가능여부를 판단하는 자리에서 전용복 선생은 일본의 장인들도 포기한 작품들 사이에서 복원 가능을 외쳤다.
“배짱이지. 인간이 한건데 불가능한 것이 있겠느냐. 어릴 적부터, 그리고 해병대 시절에 어떤 어려움도 내 의지와 내 손으로 해결이 되는 것을 터득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힘들겠지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의 연락을 기다린 지 한 달두 달이 지나도록 소식은 오지 않았다. 빚은 늘어갔고 신용은 바닥났다. 공방을 운영할 여력도, 사람도 없었다. 술로 마음을 달랜답시고 어두컴컴한 작업장에서 혼자 망가져만 갔다.
4개월 후. 일본에서 메구로가조엔의 복원 공사 중 옻칠에 관계된모든 일을 맡기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고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복원작업.

1989년 9월 전용복은 가족과 제자를 이끌고 이와테현 가와이무라의 폐교에 작업실을 열고 복원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예린칠예연구소’ 라는 작업소의 현판은 해병대의 빨간명찰처럼 빨간바탕에 노란글씨였다. 그들은 3년의 공사기간을 맞추
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일했다. 피로한 몸에 피부는 옻으로 부어오르고 진물이 흘렀지만 그들의 눈만은 광기에 휩싸인 장인의 눈 그대로였다.
3년 뒤인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일장기와 함께 펄럭이는 태극기. 다 함께 외치는 만세와 아리랑 노래 속에 긴장이 풀린 전용복 선생은 기절하고 말았다.
“사람이 긴장감을 풀어버리면 피로가 엄습해서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기쁨보다는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죠.”
조선시대 칠장이는 천민 중의 천민이었으리라. 칠장이 전용복이 처음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을 때도 한국에서는 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가장 명장다운 장인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존경받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그의 작품은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그가 디자인한 ‘전용복 칠예시리즈’ 손목시계는 최고가가 한화 8억 4천만 원에 달하지만 24개가 전량 판매됐다. 일본에서 귀화요청을 받았을 정도의 그이지만 어디를 가나 한국인으로써의 긍지를 잊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세대예요. 36년간 외세에 의해 국가를 잃어버리고, 전쟁이 일어나서 300만이 넘는 사람이 죽고, 하루에 밥 한끼 먹기도 힘들었던 빈곤이 바로 육십년 전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어요.”
그 대한민국을 벗어나 23년간 외국에 살면서 본 조국의 발전상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1983년 미국 시애틀의 항만에 현대의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본 그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적인 국가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구나. 하지만 과거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요즘의 추세에 대한 걱정도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면 가끔은 과거를 돌아봐야 해요. 과거를 오늘날에 반영시켜 승리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에요. 오늘날에 비추어 미래를 전망하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촉진제. 그것이 과거입니다. 우리도 분명 내부적으로 뛰어넘어야 할 문제들이 있어요. 그런 문제는 과거를 비추며 해결해 나가는 거죠.”
너무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그는 이제 슬슬 한국에 정착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바로크 C&F와 손을 잡고 인천에 문을 연 연구소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만년을 가는 친환경 도장재로서의 옻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이었던 높은 가격을 해결할 방법도 찾아냈다. 내년이면 시장에서 옻으로 도장한 친환경 가구를 만날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웃으며 얘기했다.
“저야 순수미술만 해도 밥 벌어먹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제 지식을 나누고, 또 우리 대한민국을 도와줬던 전세계에 다시 도움을 주고 싶어요.”
장인 전용복. 까놓고 말해 그는 너무 유명하다. 하지만 소탈하다. 청바지에 가죽점퍼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손수 차와 음식을 내주었다. 그 장인의 손.
평생을 옻을 만져 까맣게 때가 낀 듯한 칠예가 전용복 선생의 크고 투박한 손. 온갖 사회의 멸시와 천대를 견디며 묵묵히 옻칠을 하던 조선의 칠장이들 손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는 그 선조들이 없었던들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노라며 고개를 숙인다.
“외국을 갈 때 비행기 밑으로 펼쳐지는 우리나라 산하를 봐요. 그럼 웅덩이가 푹푹 파여져 있어요. 마치 우리 선조들과 선배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진흙탕 속에서 걸어간 발자국 같아요. 천민 중에서도 최하의 천민이었죠.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란 말도 듣고, 정말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어요. 그런 내 자신이 산하를 바라보면, 우리 선배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진흙탕 속에 남긴 발자국. 그 발자국에 비가 오고 눈물이 떨어지고, 나는 그 곳에 고인 잘 정화된 물을 마시고 있는 존재구나. 그래서 저는 몸을 낮출 수밖에 없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인 전용복.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그말을 하는 장인 앞에서, 그가 우리와 같은 한국인임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해병대지 37호> 글 중위 김창완 사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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