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3 15:56

디자이너 고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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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해 보이는 디자이너의 세계, 그 이면에 숨겨진 고난과 역경
해병대 정신으로 이를 극복해낸 서른 살 젊은이의 도전과 성공 스토리

<해병대지 글 중위 김창완 사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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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의상을 협찬한 디자이너, 서울 패션위크 최연소 참가 디자이너 등 고태용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여성스럽고 감성적인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해병대를 나왔다는 것 역시 그의 특이 이력 중 한 부분이다.
신사동 가로수 길에 위치한 그의 쇼룸에서 2002년 해병 919기로 입대해 군 생활을 마친 그를 만났다. 8명의 직원들 중 같은 중대, 같은 생활실의 후임인 963기 출신 직원이 있다며 웃는 그는 해병대에서 온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쪽에서도 해병대 출신이라면 선배 분들이 다들 챙겨주죠. 우리는 만드는 수량이 워낙 적으니까 공장에서 작업을 잘 안 해주려고 해요.
그런데 해병대 출신인걸 알고는 해주시는 경우도 있고, 원단을 싸게 주시는 경우도 있죠.”
그는 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다 해병대에 입대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군대에서 즐겨 읽던 패션잡지가 그의 마음속 패션에 대한 열망을 점점 키워주었다.
“말년에는 휴가 다녀오는 애들마다 패션 잡지를 사다달라고 부탁해서 탐독을 했어요. 그 때는 ‘나도 이렇게 멋지게 입고 싶다.’정도의 생각이었죠. 휴가 나가면 옷 사느라 바빴어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옷을 좋아했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옷 잘 입기로 소문난 그였다. 부모님 몰래 산 옷을 친구들과 바꿔 입는 건 둘째 치고, 어머니가 사주신 옷을 가위질 하고 리폼을 할 정도였다. 워낙에 옷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의상학과로 편입한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그러려니 하셨다고 한다. 감각과 센스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그가 패션쇼에 서는 디자이너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다.
“교수님들은 대기업에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전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하고 싶었어요. 서울패션위크에 서고 싶었고.
하지만 우리 학교를 나와서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한 디자이너도 없었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취업이나 하라고 하셨죠.”
동기들은 취업을 준비할 때 그는 옷을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유학파도 아닌 그가 서울패션위크에 설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무모했다. 서울패션위크는 18명의 남성복 디자이너가 쇼에 설 수 있는데 60~70명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률이 상당하다. 특히 매 번 쇼에 서는 기성 디자이너들 틈에서 신인이 쇼에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서울패션위크 한 달 전에야 선발된 참가자를 발표했지만 그는 3개월 전부터 쇼에 올릴 옷을 만들고 있었다.
“쇼를 한 번 하는데 2~3천만 원이 들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애들이 이론공부 할 시간에 저는 신발을 만들어 인터넷에서 팔았었죠. 그 때 반응이 좋아서 천오백만원 정도를 모았었는데 이 돈을 갖고 쇼 준비를 했어요.”
만약 그가 서울패션위크에 초대되지 못한다면 그 자금을 홀랑 날릴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믿었다고 한다. 사무실도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작업을 했고 집은 패션쇼에 못 오를지도 모를 옷들로 가득 찼다.
“난 무조건 될 거니까 안 될 거라는 가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요. 해병대 나와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추진력과 자신감, 그리고 믿음. 그런게 많이 도움이 됐죠.”
그는 그렇게 27살의 나이에 서울패션위크 최연소 디자이너로 기록되며 홀연히 데뷔한다. 클래식함을 젊은 감성으로 담아낸 그의 작품에 반응도 뜨거웠다. 쇼에 공개를 한 옷들이 모두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래봐야 본전치기였다. 한 번 쇼를 해서 벌어들인 돈을 다음 패션쇼에 모두 투자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서울패션위크에서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두 번째 서울패션위크의 테마는 프레피룩. 국내에선 최초로 미국 명문 사립고 학생들의 스타일을 클래식하게 담아낸 그의 작품에 반응은 뜨거웠다. 방송사에서 그에게 연락을 해온 것도 그 때쯤이었다.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기획 중인데 의상 콘셉트가 일치한다며 협찬이 가능하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사실 처음엔 드라마도 재미없어 보이고 배우들도 당시에는 큰 인기가 없었던 상태라 망설였어요.
하지만 방송에 의상을 공급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재미있겠다 싶었죠.”
 
그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에 팬들은 열광했고, 프레피룩과 고태용이라는 이름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언론의 인터뷰도 이어졌고,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인기의 단점이라면 프레피룩이 대중화돼서 만원, 이만 원짜리 재킷이 프레피룩이라는 이름으로 깔리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굳이 제 재킷을 40~50만원씩 주면서 살 이유를 못 느끼게 되는 거죠. 반면 다른 부분에서 돈을 벌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도 들어왔고,
CF를 찍을 때 의상을 제공하기도 했어요. 그 돈으로 지금 컬렉션을하고 브랜드를 런칭할 수 있었던 거죠.”
고태용 디자이너의 브랜드 ‘Beyond Closet’은 쇼에 전시되는 컬렉션라벨과 별도로 캠페인 라벨로 백화점 등지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작품을 하는 디자이너 치고는 계산에 능하다는 느낌도 들 정도이다. 하지만 화려해보이기만 하는 디자이너가 작품만 하면 망할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한번 쇼를 해서 옷을 팔고 돈을 벌면 그 돈이 그대로 다음 쇼 비용으로 나가요. 이윤이 없는 거죠. 그러다보면 돈이 없어서 작품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3년 정도 하다 보니 흐름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양한 활로를 뚫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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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신사동 가로수 길에 위치한 아담한 그의 쇼룸
② 작년 동대문에 이미테이션 제품이 퍼졌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티셔츠
③ 그의 책장에는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었을 패션잡지들이 수북히 꽂혀 있었다.
④ 원단으로 가득한 수납장. 화려해보이는 삶의 이면에는 작업실에서 지샌 수많은 밤과 눈물이 숨어있다
 
 유명 백화점과 편집숍에 그의 옷들이 깔렸다. 작년부터는 뉴욕으로도 그의 옷이 팔리기 시작했다. 미국 내 매장만 300개를 보유한 편집숍 ‘얼반 아웃피터스’에도 그의 옷이 깔리기 시작했다. 특히, 디자이너의 명성이 너무나 중요한 한국 시장에서 ‘꽃보다 남자’의 수식어는 큰 도움이 됐다.
“미국에서는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몰라도 옷만 예쁘면 구매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같은 가격에 신인 디자이너의 옷이 더 예뻐도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사가요. 그런 면에선 ‘꽃보다 남자’가 많은 도움이 됐죠.”
남성들도 꾸미고 사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백화점 입점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지만 무난하게 자리를 잡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고민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할 것 같았던 디자이너의 삶. 그이면에 이처럼 치열한 돈과의 전쟁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는 화려하게만 생각했어요. 패션쇼에 다니고 파티에 참석하고 유명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하지만 6개월 고생해서 쇼 때만 잠깐 멋있어 보이지 엄청 고생하는 직업이에요.”
떼돈을 벌며 화려하게 사는 줄 알았던 선배 디자이너들도 알고 보니 버는 족족 쇼에 쏟아 붓는 본전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배들은 고태용에게 일단 3년만 버티라고 했다. 매출이 있건 없건 3년을 버텨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올해로 3년차가 끝나가니 이 정도면 훌륭히 버텨내는 셈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텃세가 컸어요. 다들 젊은 디자이너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새로운 디자이너가 들어오는데 많은 거부반응이 있더라고요. 작은 한국 시장에서 디자이너가 늘어나면 파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거죠. 서로 협력하고 발전해서 파이를 키우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죠.”
하지만 그런 텃세 역시 먹고 살기 힘든 디자이너들의 현실 때문이라고 그는 이해한다. 직접 해보니 누굴 키울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이 힘든데 누굴 키우겠냐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도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서는 빠르게 자리를 잡은 편이다. 옷장속에 숨어 있는 개인의 취향과 사연을 옷에 담아내고 싶어 'Beyond Closet'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이 브랜드를 내셔널화하는 것이다.
“좋은 컬렉션을 보여주면서 고태용과 브랜드의 정체성을 잡아야 하죠. 이 사람 하면 딱 떠오르는 아이덴티티가 있어야죠. 클래식 하면서 프레피를 가미하고 젊은 감성으로 위트 있게 표현한 디자이너. 그런 아이템들을 만들어 나가야죠.”
하지만 그의 옷에는 분명 이미 색깔이 있고 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영화배우 류승범씨도 그의 단골 고객중 한 명이다.
“승범이와는 동갑내기 친구인데 옷에 완전 환장한 애예요. 류승범이나 봉태규 처럼 잘생기진 않아도 스타일리쉬한 친구들이 많이 오고 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이 입으면 홍보효과도 크죠.”
하지만 정규과정을 완벽히 밟지 못한 이력 때문에 초창기 그의 옷은 형태는 훌륭하지만 세밀함에서 부족한 면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고작 30살을 넘긴 후배디자이너에게 기라성 같은 선배 디자이너들이 해주는 얘기도 비슷하다.
“선배님들이 처음엔 워낙 어린애가 들어오니까 별로 신경을 안 쓰다가 이제는 컬렉션을 6번 연달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칭찬도 해주세요.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재미있다고들 해주시죠. 클래식 속에 선배님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 느낌을 담아낸다는 거죠. 감각이 좋으니까 숙련도를 많이 올리라는 조언도 해주시구요.”
그의 나이 이제 서른. 아직 갈 길이 멀다. 해외시장에서 옷은 팔고 있지만, 그의 쇼를 해보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있다.
“지금 선배님들 나이인 마흔 살쯤 되면, 저는 훨씬 잘 되어 있겠죠. 일찍 시작한 만큼 패션쇼를 30~40번을 했을 텐데 한국 대표디자이너가 돼야 겠죠. 돼야 하고 될 수밖에 없어요. 어디 가서 표현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남자가 해병대까지 다녀왔는데 최고가 돼야 한다는 생각도 늘 하고 있고요.”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거라는 그는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또 빼놓지 않았다. 손님은 단순히 예뻐서 옷을 사가는 것이지만, 디자이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녹아든 작품을 파는 것이라는 얘기다.
“2009년 F/W 쇼에서는 Homesick(향수병)을 주제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어요. 해병대라고 하면 흔히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나 딱딱한 제복의 이미지만 생각해요. 하지만 해병대에 오는 나이는 소년과 성인의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는 여리고 감성적인 나이죠. 그래서 가장 강한 군대에 와 있지만 속으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감성을 표현했어요. 겉으로는 밀리터리 스타일의 형태나 견장 등으로 강한 이미지를 냈지만 내부는 모두 양털 소재로 포근하고 여린 양면적인 느낌을 줬어요.”
이 정도쯤 되면 ‘아. 이 사람. 정말 전문가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농담을 건네는 그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많게 느껴질 만큼 어려 보였지만,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빛은 노련한 사업가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옷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디자인에 한 평생을 바친 대가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에게 디자이너를 꿈꾸는 후배 해병들을 위한 한 마디를 부탁했다.
“흔히 ‘된다, 안 된다’를 갖고 고민을 많이 해요. 그러다 포기하는 애들도 너무 많아요. 저도 천재가 아닌 이상 서울패션위크에 오를 수 있을지 몰랐고, 브랜드를 내서 반응이 좋을지 안 좋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전 믿음이 있었어요. 안 된다는 생각, 망한다는 생각은 절대 안 했죠. 난 무조건 될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니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거죠. 해병대에서 얻은 추진력과 자신감과 믿음.
그것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해병대지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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