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구 옹이 성남시 외곽에 위치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 앞에서 지난날 해병대의 투혼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고 있다.
[국방일보 스페셜리포트]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와 공동으로 매달 6·25 전쟁영웅을 찾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서 싸운 이들의 애국심과 투혼을 기리고자 한다. 12월호의 주인공은 해병대 창설 요원으로서, 6·25 전쟁 당시 해병대의 모든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며 불패의 해병대 신화를 만들었던 전설적인 투사인 강복구 대령이다. 글·사진=국방저널 정호영 기자
강복구 옹을 비롯해 무공수훈자회 관계자들이 무공수훈공적비 앞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오늘날 작지만 강한 군대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해병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한 걸음 한 걸음 피와 땀으로 신화를 쌓았다.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의 덕산비행장에서 해군 출신 장병 380명(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을 기간으로 창설됐다. 비록 장비와 인원 면에서 빈약한 소규모의 부대(대대급)로 출범했지만, 6·25 전쟁이 벌어지자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병대는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 1일 여단으로, 그 이듬해인 1955년 1월에는 상륙사단으로 증편됐다. 이후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1965년 1개 여단이 파견돼 엄청난 전과를 올린 뒤 오늘날에는 군단급 규모의 국가전략기동부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 등 숱한 무용담과 일화를 남긴 해병대에는 수많은 전쟁영웅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복구 대령은 전설 중의 전설로 불린다.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국방저널이 연재하고 있는 ‘6·25 전쟁영웅’의 대미(12월)를 장식할 주인공으로 그를 선정한 이유다.
처음 무공수훈자회로부터 강복구 대령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해병대의 전설로 불리는 그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고, 과연 인터뷰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할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무공수훈자회 성남시지회(지회장 김용기) 사정상 강복구 대령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이전의 다른 전쟁영웅과 마찬가지로 건강하면서도 위풍당당했다. 조만간 100세를 바라보는 고령(1924년생)임에도 불구하고 귀가 다소 어두운 것을 빼고는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기개가 살아있었다. 전형적인 군인(노병)의 풍모는 변함이 없었다.
강복구 옹이 6·25전쟁에서 받은 각종 무공훈장을 손바닥에 펼쳐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혼란스러웠어요. 군대에서도 공산주의자가 우글거렸어요. 사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어요. 해병대는 이런 혼란기 속에서 창설돼 6·25 전쟁 당시 크게 용맹을 떨치며 발전한 군대입니다.”
당시 일등병조(상사)였던 강복구 옹은 해군훈련소에서 소대장을 하다가 1949년 4월 해병대를 모집하자 곧바로 지원해 창설요원이 됐다. 그는 막 출범한 해병대 훈련소 소대장이자 모병관이기도 했다. 해병 1기와 2기 상당수는 그에게 훈련을 받았다. 작지만 강한 해병대의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군대는 평시 피와 땀을 많이 흘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강한 훈련을 해야 한다’고 당시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님이 말씀하셨어요. 이에 따라 우리 훈련소 소대장 중대장들은 실제로 그렇게 모범을 보였고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습니다. 강철은 달구어야만 더 강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강한 해병대가 만들어진 겁니다.”
강복구 옹은 해병대가 창설된 뒤 해병 간부 2기생으로 뒤늦게 장교가 됐다. 그리고 교육 기간 중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한 달 뒤인 7월 27일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경인지구작전 때는 2대대 5중대 1소대장으로, 1951년 6월의 도솔산지구 전투 당시에는 3대대 9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불패의 해병대 신화 창조에 앞장섰다.
기자는 6·25전쟁 당시 해병대의 모든 전투에 참가한 강복구 옹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도솔산전투”라고 대답했다. ‘무적해병’이라는 명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전투였다.
전사에 의하면 한국해병대 제1연대(연대장 김대식 대령)는 미 해병 1사단의 반격계획에 따라 1951년 6월 3일 미 해병 5연대가 맡고 있던 도솔산의 작전구역을 인수하고, 곧바로 6월 4일부터 전투에 들어갔다. 도솔산은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험준한 암석산(해발 1178m)으로, 주변에 가칠봉(1142m)·대암산(1314m) 등이 연결된 요충지였다. 북한군 12사단과 32사단이 이곳을 방어했다.
한국해병대의 최종 목표(도솔산 정상 1148m)에 대한 공격은 6월 18일 3대대가 감행했다. 3대대는 항공지원과 포사격 지원하에 오전 9시 공격을 시작해 11시 30분에 중간목표인 목표21을 먼저 점령했다. 19일 자정부터는 동측 능선을 따라 야간공격도 실시해 오전 5시 30분 도솔산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1대대는 3대대가 이미 점령한 도솔산 정상에 집결한 후 오전 8시경 목표 23과 24를 향해 추월 공격함으로써 대단원의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한국해병대 1연대는 적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기관총 24정, 따발총 63정, 장총 14정, 자동소총 2정, 박격포 44문, 대전차포 1문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아군 피해는 전사 123명, 부상 582명, 행방불명 11명 등이었다.
“한국해병대 1연대는 미 해병대가 고전하던 작전지역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특히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한 야간작전을 과감히 감행하는 뛰어난 작전능력도 보여줬습니다. 저는 해병대원이었다는 게 그 어떤 무공훈장보다 자랑스럽습니다.”
강복구 옹은 그러나 서부전선의 장단 사천지구전투는 끔찍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시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그는 전투환경과 병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해병대원들이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약 8백여 명이 전사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불합리합니다. 전장에서 병사는 총알받이로 싸우다 죽지만 이름은 장군이 남깁니다. 무명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오늘날 번영된 대한민국과 해병대의 밀알이 됐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복구 옹은 6·25전쟁에서 뛰어난 군인이자 지휘관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해병대의 정신과 전통을 세운 조련사로도 유명하다. ‘강복구 기합 빠지면 해병대 전체가 기합 빠진다’라는 해병대의 전설과도 같은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2차례나 해병학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혹독한 훈련과 기합으로 악명(?)을 떨쳤다. 소위로 임관하는 해병 간부 후보생(34기)을 수료식 날 완전군장 구보로 기합을 준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혹독히 단련된 해병 장교들은 월남으로 파병해 중·소대장으로 맹활약하면서 해병의 신화를 남겼다.
“해병대는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국민에 대한 봉사입니다. 그리고 강한 훈련을 통해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를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6·25전쟁과 월남전에서 우리 해병은 이런 정신력으로 싸웠습니다.”
강복구 옹은 1971년 3월 26일 대령으로 명예롭게 군문을 나선 뒤 2002년에는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는 최초로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을지무공훈장 2개, 충무무공훈장 3개, 화랑무공훈장 2개 등 수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살아있는 전설적인 해병대 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