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국방일보 2022.08.08]
⑦ 해병 3·4기 전우회 김석진 회장
제주 해병 3·4기 전우회 김석진 회장.
김 회장이 화랑무공훈장을 비롯해 전수받은 훈장을 가리키고 있다.
김석진(왼쪽) 회장이 해병 3·4기 전우회 사무실에서 박영찬 수석부회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주도 제주시 동문로터리에 있는 해병혼탑. 이 기념탑은 6·25전쟁에 참전한 제주 출신 해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제주는 해병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지난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된 해병대는 같은 해 12월 29일 진해·진주에 주둔하던 병력 1200여 명을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당시 제주도는 4·3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제주도에 도착한 해병대는 민심 수습에 힘을 쏟아 ‘국민의 해병대’로 자리매김하는 토대를 다졌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 거주하는 젊은 남녀들이 해병대에 앞다퉈 자원했다. 해병 3·4기 3000여 명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로 똘똘 뭉쳐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도솔산지구전투, 장단·사천지구전투 등에서 역전의 용사로 활약했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일곱 번째 주인공은 해병 3·4기 전우회 김석진 회장이다.
글=노성수/사진=백승윤 기자
어린 학생들 3주 훈련받고 전장 투입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 이제 다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들은 떠났지만, 그때 청춘을 바친 제주 청년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어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피 흘린 청년들의 희생을 기억해주세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남성로에 있는 해병 3·4기 전우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석진 회장은 먼저 세상을 떠나간 전우들의 이야기로 입을 뗐다. 1932년생, 올해로 ‘구순’인 김 회장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말투로 당시를 증언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가 18살이었어요. 나는 제주 애월읍에 살고 있었죠. 제주지역에도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마을에 100가구당 1명씩 군대에 지원하라는 소집명령이 내려왔어요. 제가 살던 마을은 600가구가 거주해 6명이 지원했는데, 저만 합격했죠.”
그렇게 그는 같은 해 8월 5일 모슬포훈련소에 해병 3기로 입대했다. 그리고 3주의 훈련을 마치자마자 전장에 투입됐다. “제주 청년들이 호국의 결의로 해병대에 자원했죠. 무려 3000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우리는 철모도 없이 광목천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일본식 목총을 들고 훈련을 했어요. 전투 능력은 당연히 형편없었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용맹스러운 부대였어요.”
빠르게 적응하며 강한 전사로 거듭나
제주 출신 해병대원들은 9월 1일, 제주항에서 군 수송선에 몸을 싣고 정든 고향을 떠나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출정한다. 전투 경험이 전무 했던 신병들이었지만 이들은 수많은 소부대 전투로 빠르게 전장에 적응하며 강한 전사로 거듭났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서울수복작전, 도솔산지구전투, 장단·사천지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됐다. 지금도 제주 해병대가 출정했던 9월 1일은 제주 해병대의 날로 지정돼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때 미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한미 해병대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미 해병1사단 예하 연대들이 한국 해병대를 1개 대대씩 자신들의 부대에 배속시켜 실전적인 교육을 해줬거든요. 장비나 식량도 많이 제공했고요. 한미 해병대는 주요 전투에서 함께 싸우며 전술을 공유한 혈맹이자 전우입니다.”
1950년 9월 15일, 한미 해병대는 6·25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첫 상륙 목표는 월미도와 소월미도였다. 오전 6시31분, 선봉 부대인 미 해병 5연대 3대대가 월미도 해안 상륙을 시작으로 정오쯤 북한군을 모두 소탕했다. 오후 6시, 밀물 시간에 맞춰 인천을 목표로 진행된 2차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 5연대와 함께 인천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한 뒤 북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어 인천, 부평, 김포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뒤 마침내 9월 27일 오전 6시10분께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감격을 맛봤다.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지 90일 만에 서울을 탈환한 것이다.
“상륙작전을 수행할 때 해병들이 우왕좌왕하지 않게 분대장님이 정확하게 상륙지점을 지정해줬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돌 밑에 숨고, 적의 총탄을 피하면서 전투를 몸으로 익혀갔죠. 무엇보다도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인터뷰에 자리한 해병 4기 참전용사 박영찬 전우회 수석부회장도 “인천상륙작전 때 우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밖에 없었어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죠. 보급품이 끊겨 일주일 동안 굶으면서도 정신만은 살아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무적 해병’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몸에 박힌 수류탄 파편 “자랑스러워”
김 회장은 전방 수색대대인 3대대 11중대원으로 평안남도 양덕까지 북진하며 수색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1·4 후퇴 당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큰 부상을 입었다.
“내 옆에 수류탄이 터졌을 때 전우가 목숨을 잃고, 피로 얼룩졌던 현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찰나였지만 ‘아… 이렇게 나도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파편을 맞고 후퇴하던 저도 쓰러져 정신을 잃었어요.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 극적으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그때 김 회장의 몸에 박힌 수류탄 파편만 12개. 이 때문에 자기장을 사용하는 MRI 촬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눈부신 공적을 세운 전쟁영웅이지만, 그의 몸은 고통으로 신음한다. 지금도 진통제 없이는 생활이 어렵다. 1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몸이 더욱 수척해졌다.
“마음은 살아 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요. 함께 싸운 전우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지요. 오늘 이 자리에 나선 것은 후세에게 자랑스러운 해병대 승리의 역사를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나는 몸에 박힌 파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킨 훈장이니까요. 죽음을 불사하고 이룬 상승 해병대의 전통을 여러분들이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제주도훈련소교관 하신 이기덕 소령 입니다
6.25 인천상륙시 중화기중대장 하시고
하사관학교 7,8 기 교장하셨고
제대전 동해경비사령관 하신
별명 이 오가론 이셨는데 기억나시나요 ~
종전후 많은 해병 장교분들 찾아오시고
동네 해병으로 전역하신 하사관, 병 4기 ~ 해병분들
다들 반기며 이시던데 ~
저는 수경사 30경비단/ 경호실 근무하였지만
동생은 1979년 초에 해병대 입대하여
포항 사단 헌병대 / 효자근문소 근무하였읍니다 ~
해병을 빛내주신 해병의 신이되신 여러분께 존경 과
항시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