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해병대 팔각모와 빨간 명찰을 꿈꿨습니다. 연평도 사태를 보며 꿈은 절박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번에 떨어201101280500019_1.jpg

지면 될 때까지 지원할 겁니다.

스물한 살 청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원할 겁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이런 청년이 한둘이 아니다. 1월 19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서울병무청에는 해병 1137기, 1138기를 지원하는 청년들이 모였다. 이날 하루 동안 총 280명이 면접과 체력검정을 치렀다. 지원자의 부모, 여자친구까지 따라와 해병대 합격을 기원하며 응원에 나섰다.

이번 면접은 19일부터 3일간 진행됐다. 해병대 지원병과는 일반, 수색, 화학, 정보통신, 공병, 무기 정비, 수송, 조리, 군악 등 총 9개다. 해병이 되려면 입영일 기준 만 18~28세로 중학교 이상을 졸업해야 한다. 수색병은 더 까다롭다. 키는 165~195cm 사이, 나안시력 0.7 이상에 200m 수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명문대 입학·취업 열기와 맞먹어

모집 전형의 만점 기준은 200점으로 국가유공자 자녀 등은 최고 20점까지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고교 생활기록부 70점, 체력 30점, 학력 20점, 면접 80점이다. 당락은 면접이 결정한다. 면접은 전체 비중의 40%를 차지해 그 결과에 따라 점수 폭이 벌어진다. 이날도 지원자들은 면접에 울고 웃었다. 김현석(20) 지원자는 “인터넷에서 기출 질문을 찾아 공부했다. 정작 면접에선 해병대 관련 질문이 아닌, 제대 이후 계획을 묻는 질문을 해 당황했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면접이 끝나니 홀가분하다”며 웃었다.

30점이 걸린 체력 테스트도 만만치 않다.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로 테스트하는데 각각 15점 만점이다. 만점 기준은 윗몸일으키기 1분에 58회, 팔굽혀펴기 50회 이상이다. 학창시절 체력장처럼 한두 개 더 쳐주는 인정은 없다. 병무청 강내일 해병대 담당관은 “센서가 지원자의 어깨 움직임을 감지해 숫자를 센다. 무조건 많이 하는 것보다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병무청은 지원자에게 체력 테스트 요령을 미리 알려주지만 의지가 앞서는 지원자들 귀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문정원(21) 지원자는 “미리 종목을 알고 준비했는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분명 더 많이 했는데 카운트 횟수는 훨씬 적었다. 힘드니 요령도 생각 안 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며 아쉬워했다.

해병대 지원 열기는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 열기에 버금간다. 과거에도 “해병대 합격이 하늘의 별 따기”라며 6전7기 도전한 사람들의 무용담이 있었지만 2011년 해병대 지원율은 역대 최고로 꼽힌다. 1월 경쟁률은 모집 정원 1011명에 4553명이 지원해 4.5대 1을 기록했다. 해마다 1월은 대학생 휴·복학 시기와 맞물려 지원율이 높았지만 지난해 1월 4.03대 1과 비교해도 늘어났다. 이는 2008년 7월 병무청이 해병대로부터 해병 선발 업무를 넘겨받은 뒤 가장 높은 수치다. 과거 해병대 자체 모집 때는 합격 발표 전 지원자의 중복 지원이 가능해 지원율의 거품이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높은 수치다.

특히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지원율은 2010년 11월 2.95대 1, 12월 3.57대 1로 꾸준히 상승했다. 병무청 황민환 현역모집과장은 “연평도 관련 언론보도가 해병대 지원율 상승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병역 의무와 관련해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해병대 안팎에서는 해병대 인기 첫째 요인으로 연평도 포격 사건을 꼽는다. 이날 북의 기습포격으로 해병 연평부대 장병 2명이 안타깝게 숨졌지만 한 장병은 철모가 불타는 상황에서도 북에 대응사격을 하는 등 해병대는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병대 전우회 이재원 홍보실장은 “휴가를 가려던 장병이 부대로 복귀해 적과 싸우고 포가 진지에 떨어지는데도 침착하게 대응사격하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이에 청년들이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의 확고한 국가관, 애국심이 청년들에게 전파됐다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염지호(25) 지원자는 “군대에서의 2년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고민하던 차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다. 당시 뉴스를 보고 나니 군대 가기가 더 꺼려졌고 사람들도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도리어 해병대 지원자가 늘어났다는 뉴스를 보고 놀랐다. 잠재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위험한 곳으로 가길 자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때 병역기피자가 될 뻔한 나도 해병대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오랜 해병대 인기를 설명하기에는 연평도 포격 사건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한민국 해병대, 그 치명적 매력’의 저자 김환기 씨는 “해병대를 지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청년들이 보기에 해병대가 멋있고 폼 나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해병들의 모습이 청년들의 국가관을 자극했겠지만 그보다는 먼저 멋있어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인사 관련 부서에서 약 6년 동안 근무했던 해병대 전우회 김복수 조직국장도 “훈련병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보면 멋있는 사나이,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지원했다는 대답이 절반을 넘었다”고 회상했다. 해병 수색대에 지원한 송강(19) 씨도 “주변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지만, 죽어도 괜찮다는 각오로 복무하겠다고 안심시켰다. 남자다움을 기르기 위해 지원했다”며 ‘진짜 사나이’론을 거들었다.


연예인 현빈, 오종혁, 유승호도 “필승”

 

 
윗몸일으키기를 준비하는 지원자들의 표정이 비장하다.

각 대학교 복학생 해병대 전우회의 권유도 대학생들에겐 해병대를 지원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김 국장은 “대학마다201101280500019_2.jpg


해병대 전우회가 있는데 선배 복학생들의 권유가 후배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간다. 내 아들도 내가 해병대에 가라고 권유했을 때는 시큰둥하더니 학교에서 만난 해병대 선배들을 보고 결국 해병대에 갔다”고 말했다. 한 지원자의 여자친구인 김가현(20) 씨도 “남자친구는 연평도 포격 사건 전부터 해병대를 고집했다. 한 해병대 출신 선배가 내성적인 성격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바뀐 모습을 본 뒤 라섹 수술까지 받고 선배들과 면접 준비를 하는 등 해병대 합격을 원했다”고 밝혔다. 이외에 해병대 출신 아버지나 형, 삼촌 등 가족, 친척의 권유로 지원했다는 지원자도 줄을 이었다.

해병대 인기는 연예인도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배우 현빈 씨도 최고령 해병 지원자 기록을 세우며 해병대에 합격했고 뒤를 이어 가수 오종혁, 배우 유승호 씨 등도 해병대 지원 결심을 내비쳤다. 해병대 전우회에는 가수 김흥국, 이정 등 유명인도 많다.

고의로 어깨를 탈구하고 정신질환자 흉내를 내는 등 병역을 기피하는 청년이 끊임없이 나오고,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훈련 기간이 늘고 강도가 세졌다며 불평하는 장병이 늘어난 오늘 “사서 고생하겠다”며 해병대를 지원하는 청년들은 분명 신선하다. 하지만 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말이다.

“지원자들이 충성, 국가 등을 멋있는 판타지로 여기는 것 같다. 남성이 강했던 시절의 향수가 투사된 것이다. 이보다는 전쟁과 분단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이 지원자들에게는 더 필요하다. 판타지에 사로잡힌 군인은 지휘관도 통제하기 어렵다.”

한 해병대 관계자도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해병대 인기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과 이에 대한 동경으로 해병대 지원자가 늘어나고, 이것만 조명되는 일은 해병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이창훈 인턴기자 경북대 영어교육과 2학년 최유정 인턴기자 서울대 영어영문과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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