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송석구 /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 가천의과학대학 총장
지금도 군대 얘기를 하면 재미있다. 남자들이 하는 얘기 중에 제일 재미없는 것이 군대 얘기라는데, 여전히 신명이 난다.
많은 연륜을 거쳤어도,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인 모양이다. 아마 그 시절에 내 젊음의 열정과 용기, 그리고 조국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고스란히 스며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지난해 북한의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때도 일간지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슬픔과 울분을 삭이며, ‘노병의 편지’를 수많은 독자에게 띄웠다. 특히 46인의 해군이 산화하고, 한주호 준위가 생때같은 목숨을 묻은 백령도 앞바다를 얘기하면서는 가슴이 아렸었다.
시신도 찾지 못한 젊은 용사들이 말없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을 때 할 말을 잃었다. 그 가족들의 심사는 오죽하겠는가. 서해의 낙조가 그보다 붉었을까.
그런데 지난 3월 26일, 벌써 1주기다. 그 푸른 바다에 어린 46명 수병의 아픈 사연들이 어느덧 과거의 시간이 되고 있다. 서해의 뼈아픈 전사(戰史)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해병대 대위 출신이다. 젊어 한창 때 지금은 잊힌 전쟁으로 치부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정글의 전쟁터를 누볐다. 포병 관측장교로 부하들과 함께 숱한 생사의 갈림길에 섰었다.
등에서 죽어가는 전우를 업고 어떻게라도 살리려고, 수송 헬기를 찾아 포화 속을 줄달음질 친 적도 있다. 매일 밤, 스스로 죽음의 공포에 떨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있다. 1967년 2월에 있었던 베트남 추라이 짜빈둥 격전이다. 당시 월맹군과 새벽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 4시쯤,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숲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월맹군의 기습 침투가 시작됐다. 나는 짜빈둥 격전지에서 불과 2㎞쯤 떨어진 140고지에서 관측 임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정글은 대낮같이 밝아졌고, 아군 중대와 적들 사이의 전투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병대 중대와 침투하는 적들이 마주치면서 빗발치듯 총격이 오갔다. 짜빈둥의 중대 포병관측 장교는 과감하게 진내 사격을 감행했다. 삽시간에 우리 해병대는 미리 파놓은 토끼굴로 산개했고, 적들을 겨냥한 집중포화가 이어졌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실로 필사즉생(必死則生)의 현장이었다. 멀리 먼동이 터올 때까지 전투는 계속됐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은 포연이 정글에 가득해서야 끝이 났다. 월맹군 전사자는 250여 명, 우리 군도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내가 멀리서 그 전투를 보면서 체득한 것이 ‘삶과 죽음의 극복’에 관한 철학이다. 요즈음도 외부 초청 특강을 할 때, 주제로 삼고 있다. 젊은 시절의 그 치열했던 경험이 44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삶을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국가로부터 참전수당을 받고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내 생활에 머물러 있다.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한 달에 한 번 맛보는 옛 정예 해병의 기억이 여간 기쁘지 않다.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6일 1주기를 맞아 772초계함에서 산화한 46인 영웅이 편안하게 잠들었길 빈다. <국방일보 20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