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상병 이강덕 해병대지 41호

 

나라 전체가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현실은 비참했지만 해병대의 병영문화만은 참으로 멋있었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 전쟁 속 나를 지켜주던 선임, 또 나를 지켜주던 후임. 목이 마를 때 수통에 남은 한 모금의 물을 자신이 먹기보다 후임에게 양보했던 그때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수십여 년에 걸쳐 악습과 오도는 풍선처럼 서서 히, 그러나 너무나도 만연하게 퍼져 우리도 모르는 새 무감각해진 것이 사실이다. 가장 정직해야 하고 강인해야 할 해병대원이 입을 닫고 침묵하는 일은 모두가 도덕불감증을 앓고 있거나 어쩌면 자신도 이러한 악습과 부조리의 수혜자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떻게 하다가 그 멋진 기수문화가, 또 선임기수라는 명예가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참담한 심정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과정은 때 묻은 껍질을 벗겨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답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충성, 명예, 도전이라는 해병대의 핵심가치이다.
대한민국의 해병대라 하면 충성의 이름아래 ‘작지만 강한군대’, ‘단결력과 전우애’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 해병대는 나라에 대한 애국과 헌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직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때 느낀 분노, 연평도 포격사건 때 흘리던 눈물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바로 국가와 해병대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뒤돌아서서 맞닥뜨린 현실에서 그 충성은 누구를 향해 있는가? 수십 년 동안 고착되어 온 이 문제는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기수라는 규율과 우리의 행동양식, 권리와 의무의 형태, 자기주장을 피력할 권리와 그 인정, 의사소통의 구조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을 모두 뒤집어야 할 만큼 어려운 과제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오도된 전통의 근본은 병들만이 해병대 전통을 이어간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병들만이 전통의 주체이고 간
부는 적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우리는 우리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소대장의 명령, 지시와 중간역할을 하는 부사관에 의해 상급지휘관의 의도가 우리에게 잘 전달되는 속에서만 선, 후임 간의 역할이 잘 조화될 수 있다. 국가와 해병대, 또 그들의 지시를 받는 간부들에 대한 믿음, 이것이 해병들이 자랑스러운 해병대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핵심인 것이다.
해병대가 된다는 것은 해병대의 가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며 그것이 가진 드높은 명예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명예란 국가에 충성하는 우리 해병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빨간 명찰을 달 때 맹세한 뜨거운 사명감 속에 우리는 모두 다 같은 해병대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선임에게도 나의 후임에게도 모두명예롭게 대하여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소통’을 택했다. 나는 우리중대에 신병이 들어오면 신병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눈 후 공중전화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같이 그들의 부모님께 전화를 한다. 병을 대표할 어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선임이라는 입장에서이다. 또, 신병들도 자신 앞에 놓인 실무생활을 걱정하는데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냐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더라도 돌아오는 대답은 “잘 부탁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이지만, 난 그 ‘잘 부탁합니다.’라는 여섯 글자에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할 그들을 다시 새기고 명예로운 해병대 대원이자 사랑스러운 나의 후임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자식들이 속한 해병대의 자부심과 명예감을 동감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며, 신뢰와 자부심이 바탕이 된 해병대의 명예가 빛날 수 있는 작은 걸음이 되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은 ‘도전’이다. 도전은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과감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미래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사실 소수병력으로 창설했던 우리 해병대는 시작부터 도전 그 자체였다. 그런 우리에게 이번엔 내부로부터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해병대 정신에 위배된 행동을 하여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가해자이면서 가해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통을 주면서도 그것을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고 후임을 괴롭히는 일은 인권과 관련이
없으며 기수문화 안에서 허용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멸망이 외부세력의 침략보다 내부의 문제가 대부분이라는 역사의 진실을 돌아볼 때 지금은 위기이다. 이 위기를 우리는 도전 정신으로 정면으로 맞서 타파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지금 당장 버려야 할 쓸데없는 것들은 무엇이고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확히 인식하고 과감히
척결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은 것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깨진 알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말을 새겨 우리 스스로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벼랑 끝에 선 지금, 해병대의 핵심가치의 의미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해병대의 핵심가치는 해병대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해병대적인 삶의 질서이다. 또 우리에게는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이자 마지막 자존심이다. 아무리 해병대가 강력한 군대가 되어도 해병대원이 박탈감과 고통을 호소한다면 해병대의 발전을 말하기 어렵다. 충성, 명예, 도전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소속감과 긍지를 키우고 후임을 부하처럼 부리거나 자신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다른 해
병대원의 명예와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그리고 모든 해병은 고유한 인격으로서 동등하게 명예로운 존재임을 체득하여 야 한다. 나는 선임이란 민주적으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조력자로서 의 역할을 하는 존재이지 명령,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생각의 끝에 다시 한 번 반문해 본다. 해병대의 핵심가치는 정
말 변질된 해병대의 기수 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으며, 그 의미를 오롯이 새겨 혁신에 앞장설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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