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해병대 제6대 사령관 공정식 前 사령관
처절했던 동족상잔의 6·25전쟁 비극이 3년간의 막을 내리고 분단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지 올해로 환갑을 맞이하였다. 이제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 태어난 이들도 지금은 머리에 서리가 내릴 것이니 말로만 들었던 전후 세대에게 6·25전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생소해졌다. 그러니 6·25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 정도로 치부되어 왔을 뿐더러 국군 중에서 가장 적은 병력을 가진 해병대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참전 노병으로서 우리 후배 해병들에게 6·25전쟁에서 선배들이 어떻게 싸웠는가 최초승전보를 안겨준 전투로부터 60주년을 회고하고자 한다.
#1
먼저 국군 중 최초로 싸워 이긴 우리 해병대 김성은 부대의 진동리 전투 및 통영상륙작전에서 얻은 국군 최초의 1계급 특진과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에서 한국해병대의 영광은 빛난다.
우리 해병대가 손원일 해군 총참모장의 혜안(慧眼)에 따라 ’49년 4월 15일 불과 380여 명의 보잘것없는 규모로 창설된 지 바로 1년 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마치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 ‘6·25전쟁의 전설적인 영웅’ 김성은 대령은 마산 진동리와 통영 전투에서 첫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이 승전보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피난길에 나섰던 이 나라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다.
’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벌어진 마산서북지역 진동리(현 마산시 합포구)와 통영지구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는 봉암리 계곡을 거쳐 8월 2일 새벽 고사리지서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 6사단 차량부대가 예상대로 3일 밤 접근하자 유인 사격으로 정찰대대를 궤멸시켰다. 그 후 6일 새벽 인민군 6사단이 야반산을 점령해 우리 병참선이 위협받자 다시 김성은 부대가 야반산을 탈환하고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인민군 6사단을 재기 불능케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는 6·25개전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으로 평가된다. 신생 해병대의 첫 전과에 고무된 손원일 제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김성은 부대 전 장병에게 국군 최초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여기서 김성은 부대가 인민군 6사단을 저지 격멸한 것은 이 부대가 그 무렵인 7월 27일 육군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던 채병덕(전 육군총참모장) 소장을 하동 근처에서 전사시킨 적군이었으므로 그 분의 원한을 우리 해병대가 보기 좋게 갚았다는 사실이다. 또 우리 해병이 진동리전선에서 처음으로 미 해병부대를 만남으로써 창설 초기의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행운을 잡았다면,
통영상륙작전은 한국 단독 최초로서 김성은 부대장의 순발력 넘치는 지휘로 큰 승리를 거둬 그 후 인천상륙작전에 우리 해군과 해병이 함께 참전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통영상륙작전 당시 나는 미국에서 도입되는 704함의 부장으로 태평양을 건너 ’50년 7월 25일 진해에 입항하자마자 다음날인 26일 이미 선착(先着)한 703함과 합류해 진동리 및 통영상륙작전 지원을 위해 투입됐다. 이를 통해 김성은 선배와 나는 백년전우로서 인연을 굳혀나갔다. 이통영상륙작전에서 우리 해병대는 승기(勝機)를 잡고 무적해병으로서 6·25전쟁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위 전투에서 얻은 해병대의 애칭‘귀신 잡는 해병’의 유래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애칭은 종군 여기자인 마게릿 히긴스가 통영상륙작전을 보고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쓴 기사에서 비롯됐지만 그 기사는 UPI통신 인터뷰를 인용한 것이었다. 진동리 전투의 UPI통신 인터뷰 기사는 지금껏 보관돼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당시 진동리 전투가 계속되던 8월 5일 UPI 소속 4명의 기자들이 김성은 부대 본부중대장인 안창관 중위와 입담이 좋은 염태복 상사를 인터뷰했고 이 기사가 여러 외신에 대서특필되자 마게릿 히긴스 여기자가 이를 보게 됐고, 그녀는 8월 23일 통영상륙을 마친 김성은 부대를 취재해‘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한국 해병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러니 이 애칭은 진동리 전투의 UPI통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2
다음으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우리 한국 해병대의 용맹성을 전 세계에 알린쾌거다. 6·25를 역전시킨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 84일 적치의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휘날린 감격은 우리 대한민국의 자부심으로서 아직도 우리 머릿속에 생생하다.
또한 우리 해병대의 6·25 용전상은 동서 해안에서 펼친 도서부대의 활약이다.
함경도의 양도, 원산 앞의 여도, 서해 진남포 앞의 초도, 그리고 옹진반도 앞 백령도등 우리 해병도서부대는 유엔군 해상봉쇄의 첨병이 되었으며 유엔 함정의 지원 역할과, 불시착 조종사의 구조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금도 국가의 전략적인 안보 거점 역할을 하고 있는 백령도 등 서해도서는 김정일의 목에 비수로 남아있다.
그리고 도솔산 전투와 서부전선 수도권 사수의 자부심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내가 대대장과 부연대장으로 진두지휘했던 도솔산 대첩과 김일성 모택동 고지등 중동부 전선에서 벌인 승리의 금자탑은 우리 해병대가 쌓아올린 6·25전쟁 쾌승의 백미다.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우리 해병대는 휴전 때까지 495일, 1년 4개월 10일간에 서부전선 수도권을 사수했다. 당시 적은 개성 송악산 일대의 고지에서 아군 진지가 감제 당하는 불리한 지형 여건의 어려운 전투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을 넘보는 중공군과 맞서 싸워 이겼다. 오랑캐를 격파시킨 ‘파로(破虜)’의 사명을 다해 우리민족의 역사적 한을 풀어냄은 물론 완벽하게 수도권을 지켜낸 일은 아직도 우리들의 자랑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휴전 후 포항으로 이동하기까지 약 8년 동안 우리 해병들은 임진강, 장단, 도라산 지역에서 만에 하나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공산군으로부터 수도 서울 사수의 수문장 노릇을 완수했다.
이 무렵 제한된 공격의 불리한 고지쟁탈전이라는 틀 속에서 우리 해병전투단 5천명이 중공군 19병단 65군단 예하 193, 194, 195보병사단 및 8포병사단 4만 2천명을 때려 부수고 물리친 임진강, 장단, 도라산 전투가 과소평가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3
이제 6·25전쟁 60주년을 회고하며 마지막으로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있다.
내가 늘 주장했듯이 인천상륙작전을 국제적 기념행사로 격상했으면 좋겠으며 금년은 6·25전쟁 60주년이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인천에 한미 해병대 안보 공원을 조성해 세계적 명소로 꾸며야 한다는 소망이고 바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소망에 공감하기를 바란다.
이제는 하나둘 사라져 가는 역전의 용사들을 기려줄 영국과 영국연방 세계대전 기념비에 적힌 로렌스 비니언(L. Binyon)의 헌시(獻詩)가 생각난다. <해병대지33호>
스러져간 그대들 For the Fallen
그들이 늙고 나이가 그들을 시들게 하고,
세월이 그들을 잡아먹어도,
태양이 지고 아침이 와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리라.
They shall grow not old, as we that are left grow old:
Age shall not weary them, nor the years condemn.
At the going down of the sun and in the morning
We will remember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