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해숙
밤새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20층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집도 바람 소리의 강약에 따라 좌우로 흔들림이 계속되었다. 미쳐 끄지 못한 텔레비전에서는 태풍이 올라온다며 아나운서가 숨가쁘게 떠들었다. 바람 많은 제주에서 살아온 것이 벌써 수십 년, 제주를 흔드는 바람소리도 하루의 일상에 지친 나의 잠을 깨우지 못했다.
텔레비전 소리에 잠을 깼다. 화면 속에서는 물속에 잠긴 도시가 비쳐지면서 기자의 숨가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비비며 화면을 유심히 보았다. 물속에 잠긴 도시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한해에도 수없이 많은 태풍이 지나가는 제주도! 수없이 많은 태풍이 아무런 피해 없이 이름만 남기고 가는 제주도에 이게 무슨 일인가! 텔레비전 속에 모습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친정집에 전화를 했다. 뚜-뚜-뚜- 불통 이였다.
일가친척들에게 차근차근 전화를 했지만 모두다 불통 이였다. 태풍‘나리’로 제주도는‘난리’가 아니었다.
태풍‘나리’는 제주도의 전 지역에 피해를 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막대한 상처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집 한 채가 전 재산인 우리집은 다행이도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친정집을 포함하여 친척들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살아야할 이유도 없었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해병대가 온다고 했다. 집채만한 파도가 계속 치고, 비행기마져 결항된 상태에서 그들이라고 별수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 침수된 도로와 쓰러진 전봇대와 가로수, 집을 잃은 이재민들... 생지옥의 상태에 빠져버린 상황에서 해병대 그 이상이 온다고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해병대 1,300명이 왔다. 높은 파도를 헤치고 제주도에 도착한 해병대는 짐을 벗어 던지고 삽과 괭이를 들고 바로 복구작업에 착수하였다. 해병대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작업을 시작한지 하루가 지나자 물바다가 된 제주시내에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물에 잠긴 도시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나자 폐허가 된 건물들이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자 도시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였고, 나흘이 지나자 제주도 전 지역에서 수혜 복구의 붐이 일어났다. 복구 작업에 뛰어든 해병대들은 수해현장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부상과 피부병, 장염 등의 질병이 발생하였지만, 아픈 몸을 숨기고 해병대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냐며 복구 작업에 끝까지 함께했던 해병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제 어느덧 2년이 지나 3년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의 제주도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태풍 나리의 상처를 찾을 수 없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태풍의 상처를 잊고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제주도가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집채만한 파도를 뚫고 목숨을 걸고 찾아준 1,300명의 해병대는 제주도민들에게는 백만 명이상의 힘이였고, 생명의 은인이였다. 이제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는 해병대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부대가 되었다. 1949년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면서 3,000명의 병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나라를 구했고, 2년 전에는 태풍으로 초토화된 제주도를 구했다. 제주도와 해병대의 인연은 피로 맺어진 운명적인 관계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해병대가 있었다.
제주도민들은 국민의 군대! 제주도민들의 군대! 해병대를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믿는다.
해병대가 분단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제주도를 세계적인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 줄 것임을.... 2010년 환갑의 나이를 지나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 해병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2009 해병대지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