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대대가 제3참호 공략에 성공했다는 소식.
71대대의 3중대가 일궈낸 이 성과 뒤에는 목표까지 함께 가지 못한 많은 장병들의 눈물과 땀이 숨어 있었다.
1중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보다 힘들게, 누구보다 치밀하게 준비했지만 그들은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쉬운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그 곳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실제 전쟁에서는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실패는 여기서 배우고 끝을 내리라는 중대장의 훈련 참가기를 소개한다.
글 71대대 1중대장 대위 석현우
“1중대는 첨병중대로서 본대를 엄호하고 위험을 사전에 탐지하라.”
이제 진짜 전투에 들어가는구나. 방어준비가 끝나고 대항군의 공격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빛 없이는 1m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 중대 방어지역으로 적들이 기동하고 있다는 전파를 받았다. 이윽고 전방에 매복한 청음초로부터 교전상황에 대한 보고가 계속 들어왔고 나는 대대에 화력을 요청하면서 적이 어디로 돌파를 시도할 것인지 끊임없이 추측을 하였다.
‘이것이 상황판단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가.’ 머릿속을 바삐 움직였다. 다양한 상황을 예측하고 이를 조치하는 연습을 더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로부터 2시간 가량이 지나서 전방 지뢰지대와 전단상에서 적 관측보고가 들어왔다. 60mm 화력을 지원하고 상급부대 화력을 요청하였지만 관측소가 야간 관측에 제한을 받아서인지 대항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못했다. 대항군의 공격에 전단에 배치된 소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1소대가 무전이 두절된 지 30분 후 중대 지휘소 50m 전방에 배치된 60mm반에서도 고함소리와 치열한 교전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60mm반의 매복에 걸려들어 적이 크게 당하고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어느새 대항군의 목소리가 점점 많아지더니 급기야 중대본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중대본부인원으로 교전을 준비하였으나 곧 적이 압도적 다수임을 깨닫고 작전상 은폐하기로 결심하였다. 대항군의 고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거의 진지에서 20m 이내였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왔다. 진내사격을 요청하려고 무전기를 더듬어 찾는데 중대망을 들고 대대에 화력을 요청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대항군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다행히 대규모의 대항군은 중대본부 진지를 지나쳐 점점 우리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1소대 1분대장으로부터 무선이 왔다. 1분대는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3분대와 합류하여 지휘를 받기 위해 중대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중대가 궤멸될 만큼의 피해를 입었고, 전투력이 매우 저조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중대가 받은 피해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순간 통수강령에서 보았던 글귀 한 구절이 생각났다. “불리함 속에서도 지휘관이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지휘관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분명 패배한 전투가 된다.”는 글귀.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공격 작전을 할 차례. “꼭 살아서 목표에서 다시 만나자.” 정찰대인 1소대를 투입하며 소대를 점검하고 격려 하는데 자못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출발하는 정찰대의 뒷모습을 보면서 실제 전투였다면 목숨을 건 임무를 부여받은 대원들을 과연 제대로 쳐다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두 시. 비에 천둥번개까지 치는 가운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악기상에 모든 무전통신이 두절되었고 첨병소대는 길을 잃어 빙글빙글 맴돌았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중대원들의 초조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에 달해 있었다. 전장공포 속에 내몰린 중대원들을 다독이며 목표지점에 도달했고 통신또한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도 잠시. 격렬한 포탄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오고 통신망으로 소대장들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중대장님, 적 포탄으로 인해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괴멸될 것 같습니다. 전방으로 이탈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나는 포탄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결심을 했다. “현 지역을 고수하고 급조호를 구축하라.”
이후 통신이 두절되어 더 이상의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적이 격멸된 것으로 판단하였고, 적 1참호에 화력 유도를 하기위해 중대본부를 이끌고 적 참호를 향해 오르다 매복해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았다. 본부원 대다수가 전사했다. 그 순간 이대로 전사하느니 화력을 유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 생각되고. 화력 유도를 위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난 곧 적 화력으로 전사하고야 만다.
철모를 벗고는 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중대원은 “중대장님이 잘못 판단하셔서 중대본부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라고 억울하고 침통하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슬프게도 너무나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조금만 주변 첩보를 수집하고 신중히 판단하고 조치했으면, 내 중대원들이 전사하지 않았을텐데 미안한 후회가 밀려왔다.
과학화 훈련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우리 대대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과훈단 창설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부대로서 평가되었다.
하지만 나와 우리 중대는 너무도 아쉬웠다. 그리고 우리 중대원들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그 힘들었던 훈련 기간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극심한 목마름을 이겨내고,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 중대장의 뒤를 따라와 준 중대원들. 지시받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철조망 아래를 기고, 절벽지를 건너고 소대원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솔선수범한 중대 간부들. 그 중대원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주었는가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과학화 훈련단에서 트럭을 타고 철수하면서 나는 뒤에 탄 중대원들의 우렁찬 군가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높은 사기.. 이 거센 순수함...’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웃으면서 운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상황인가? 이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하였고, 또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렇게 훌륭한 나의 병사들에게 과연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해병대지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