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다니거나 사회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묻는다.
“학생, 군대는 갔다 왔지?”
“군대는 어디 나왔어요?”
남자가 사회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특히, 남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군대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
“저는 해병대를 나왔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면
또 매번 같은 질문을 받는다.
“거기는많이힘들지?”,“ 왜거길갔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병대라고 하면 가면
힘든곳, 이유가 없으면 안가는 곳, 일반 군대와 다른 곳이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나쁜 시력으로 4급 판정을 받았었고, 그것을 고쳐 재신검을 받아 군대를
갔다고 한다면 다들 하나 같이 말한다.
“미쳤구나?”
그 얘기 역시 입대하기 전에 주위 사람들, 친구들에게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해병대
나오셨어요”라는 말에 다들 “아...그렇구나”로 수긍을 하며 더 이상 질문없이 끝맺음을 한다. 사람들은 군대를 특별하고 가서는 안 될 곳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해병대는 더욱이 왜 가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도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20살에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많이 안 좋았기 때문에 4급 판정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라섹수술을 권하셨고 나도‘남자가 군대는 갔다 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였기 때문에 못이기는 척 수술을 한 후에
재신검을 받아, 해병대에 자원 입대를 하였다. 당시 친구들은 공익근무요원 판정을자신에게 “팔아라”, “ 너
대체 왜 가느냐”, “ 미쳤느냐”라고 말렸었다. 우리가족만빼고...
나도 사실 마음속으로 100%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가기 전부터 해병대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때 입대를 하게 된 계기를 아버지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중학교때 아버지가 장난삼아 “대학에 떨어진다면 넌 재수를 시키지 않고 해병대로 바로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말 졸업 후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였고, 내가 욕심을 부려 아버지께서는 재수를 허락하여 주셨다.
나도 그 약속을 잊었듯 아버지도 잊으신 듯 했다. 나는 해병대에 입대를 함으로써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모습에 아들에게 고마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 약속을 잊으신 것 같았지만, 나는 재수를 시켜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빚은 갚을 수 있었다.
평소 군대에 대한 말씀이 전혀 없던 아버지셨기 때문에 군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해병대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었다. 아버지가 권하시고, 가겠다는 마음을 이미 먹었기 때문에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입대 당일날 담담하게 입대하였다.
그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남자니까 나중에 군대를 가겠지 라고 생각을 했고, 자라면서 나는 군대처럼 조직문화에 적성이 맞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철이 없었던 것인지,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입대를 하였기 때문에 난
군대를 안가도 됐는데 괜히 갔다 라든지, 4급 판정이 참 아깝다 라든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자 라는 거창한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입대를 하고 훈련병, 이병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도 많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가 왜 아버지말만 따라 여기에 떠밀려 들어왔을까 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100일... 첫 휴가.
아버지께서는 마중까지 나오셨다. 경상도 출신이신 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하신 줄만 알았는데 그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구분들 모임, 술자리에는 다 날 데리고 다니시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해병대를 갔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그렇게 평소 무섭고 어렵다고 느끼던 아버지가 해맑게 웃으시면서
자랑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재수를 하고,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아버지에게 항상 죄송스럽게 생각해오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또한,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보니 태어나서 처음 효도라는 것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입대 후 아버지를 두 번 뵙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일병때 밖에서 일을 하시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아들을 힘든 해병대 보내놓고 이렇게 가버리시면 난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하고, 이럴 것이면 군대에 왜 보냈느냐며 속으로 많이 후회도 하고,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아픔이 치유되었을 때는 휴가 나갔을 때 본 그 모습, 눈수술까지 해서 군대에 갔다며 자랑을 하시는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남은 군생활을 힘들어도 힘들지 않았고,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전역을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보면서 아버지가 수술까지 시켜 가면서 군대를 보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를 갔다 왔다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그전에는 몰랐었다.
취직을 준비해도, 아르바이트를 해도 20대 중반을 넘긴 남자에게는 군대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 다닌다.
군대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왔다는 것이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책임감 있고 건강하며, 기본적인 능력이 되는
사람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걸 몰랐었다. 또한, 사회적 시선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그때의 선택을
항상 스스로 고맙게 여긴다.
누구를 만나도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예비군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국방의 의무를 다 마치고 왔다고 스스로 떳떳할 수
있기에 나 자신의 선택에 절대 후회 없음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 국방의
의무를 무사히 마쳤다 라는 자부심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군대라는 남자들만이 있는
조직에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친구들과 전우가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힘이 된다.
중·고등학교 이후에 어디에서도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에게 사심없이 조건없이 진심으로 사귈 수 있는 곳이 군대가 아닌 다른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한다. 서로에게 거짓이 없이 모든
고민과 생각을 털어놓고 2년여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드는 정은 어디에서도 만들 수 없는
우정이라 생각 한다. 그들과 함께 만든 추억은
내가 항상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또한 지난날의 추억을 함께 곱씹을 수 있는 전우가
있다는 것은 나의 큰 재산이라 생각한다.
전역을 하기 전 후임들에게“너희들도 군대라는 인생의 마지막 휴가를 다치지 말고 잘 보내고 나와라”라고
얘기했다. 전역을 한 이후에는 사회라는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대 안에서는 일반 사병에게는 사회만큼 치열하고 거친 경쟁은 없고, 다음날에 대한 걱정과 부담이 전역 이후의 일들이지 당장 그 안에서 일어날 일들은 아니다. 군대 안에서의 걱정들은
그 안에서 천천히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은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드는 재충전의 장소라 생각한다.
앞으로 군대에 가야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신에 대해, 남과 나의 관계를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곳,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는 군대라는 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휴가를 알차게 보내고 사회로 돌아올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고 항상 하늘에서 아들을 위해 지켜봐주시고 계실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병무청 블로그 청춘예찬 이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