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23일 연평도에서 북한군 포격에 의한 인명피해는 가슴 아픈 일이다. 과거 서해 도서에서 소대장으로 국토방위를 했던 필자(예비역 해병대위)로서는 더욱 안타깝다.
▲ 조성국 교수 |
과거 국군 중에 최강부대라는 해병대였는데… 1972년까지 강군이던 해병대를 73년 해군에 예속시킴으로써 전력을 약화시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당했으니 이제 해병대를 특수목적군으로 독립시켜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고, 또한 최강부대를 국토방위에 더욱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 ‘귀신 잡는 해병’ 국가방위에 더욱 활용 필요
해병대는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현역 및 예비역이 비교적 단결이 잘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강군의 역사를 살펴본다.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의 덕산 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해병대가 최초로 주목받은 것은 지리산 공비소탕작전 때였다. 49년 8월 29일 경남 진주, 창녕, 함안 일대 지리산에 숨어들어 유격활동을 벌이던 공비소탕을 위해 투입된 군경 합동작전에서 해병대가 선봉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50년 ‘6ㆍ25사변’ 발발 이후에는 해병대가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 알려질 정도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50년 8월 17∼19일 해병대 김성은(전 국방부 장관)부대가 경남 통영반도에 최초로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인민군 6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통영상륙작전을 취재했던 미국 일간지「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女)’가 ‘Ghost-catching Marines’(귀신 잡는 해병) 제하(題下)의 기사에서 ‘그들은 마치 귀신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고 한국 해병대를 극찬한 데서 ‘귀신 잡는 해병’의 효시(嚆矢)가 됐다.
또한 51년 해병 제1연대가 도솔산 전투(강원도 양구)에서 적 1개 연대를 격멸하고 고지를 탈취하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 해병’이라며 격려했던 것도 ‘무적 해병’의 어원이 됐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양도상륙작전, 김일성고지 점령, 장단지구 전투 등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65년 10월 3일에는 전투부대로서는 처음으로 해병 청룡부대(제2여단)를 월남에 파병해 캄란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53년 프랑스군이 8차례에 걸쳐 공격했다가 실패했고, 월남군이 18년 간 한 번도 함락시키지 못해 월맹군의 아성이었던 캄란지구를 한국 해병대가 단 하루 만에 탈환했기 때문이었다.
67년 2월 15일 월남 중부 꽝아이성[廣義省] ‘짜빈동’[茶平東(차평동)] 전투에서는 청룡부대 제3대대 제11중대가 1개 중대병력으로, 기습공격 해온 월맹군 제1연대에 맞서 243 명을 섬멸하는 월남전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올리자 외신기자들이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해병대의 대표적인 임무는 수륙양용차(LVT)와 고무보트(IBS), 상륙주정, 헬기 등을 이용한 상륙작전이다. 상륙작전이 주 임무인 해병 제1사단은 북한군 2개 사단을 묶어놓는 전략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해병대의 전투부대는 제1사단 외에 제2사단, 제6여단, 연평부대 등이 있으며 도서방어와 해안방어 임무도 맡는다. 제2사단은 상륙훈련을 하면서도 수도 서울의 서측방을 방어한다.
짜빈동 전투는 종래의 해병대 6대작전에 새로이 추가됨으로써 7대작전의 하나로서 해병대전투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 7대작전은 ①통영작전 ②경인지구작전 ③도솔산지구 전투 ④김일성ㆍ모택동 고지 전투 ⑤양도작전 ⑥장단ㆍ사천강지구 전투 ⑦짜빈동 전투이다.
이런 국군 중의 최강부대를 이제 특수목적군으로 해군에서 독립시켜 국토방위를 위하여 더욱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