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혁 대위 해병대6여단
서해 최북단 백령도의 새벽녘, 자욱하게 내려앉은 해무(海霧)를 헤치고 연병장에 들어서서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두 주먹을 빠르게 뻗어본다. 아침 운동의 마지막인 400m 전력질주가 끝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타오르는 태양이 백령도 전경을 비추고 연병장 한편에 새겨진 ‘서북도서 절대 사수’ 입간판을 붉게 비춘다. 때마침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른 새벽을 깨우며 숨이 턱에 차도록 매일같이 운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전우들에게 나는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해병 정신을 통해 복싱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 내가 ‘챔피언’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과 명예, 타이틀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전하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대학생 시절 처음 복싱을 접하고 그 묘한 매력에 푹 빠졌다. 복싱에 전념하려고 군장학생을 취소하려고 했을 만큼 복싱은 나에게 특별한 열정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소위 임관 후 힘든 초급장교 시절을 이겨내는 힘이자 탈출구였다.
업무에 자신감이 생긴 뒤에는 복싱을 좋아하는 해병들을 모아 ‘INVICTUS(천하무적)’라는 소규모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변변치 않은 장비였지만, 좋아하는 복싱을 군대에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해병대6여단으로의 전입은 나의 복싱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싱체육관 하나 없는 불모지의 환경은 큰 난관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였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으로 섬에서만 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독특한 훈련법을 구상해 나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실력을 쌓아나갔다. 또 아마추어 복싱과 프로 복싱, 종합격투기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전우들을 만나 귀한 노하우를 전수 받았고, 함께 피땀을 흘리며 운동했다. 불가능을 극복하고 성장해가는 성취 속에서 복싱은 다시는 취미가 아니라 인생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선후배 장교, 전우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프로복싱 ‘데뷔전’에 출전해 ‘챔피언’이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됐다.
‘안 되면 될 때까지’의 ‘해병 정신’을 통해 복서로서뿐만 아니라 해병 장교로서 책임감과 성실함을 배운 나는 6월 1일부로 대한민국 해병대위로 진급했다. 2년 전 설레는 마음으로 중위 계급장을 달 때와는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가 사뭇 다르다. 그동안 더욱 단단해진 ‘무적해병 상승불패 정신’으로 서북도서 절대 사수의 사명을 다함은 물론,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정신’으로 국민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주는 ‘복싱 챔피언’이 되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의 각오를 다짐해 본다. <국방일보 병영의창 2020.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