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길 해군대위해병대2사단 선봉여단
해병대2사단에 처음 부임한 날,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기억난다. 그 포스터 하단에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문구는 다른 부대의 어떠한 문구보다도 인상 깊었다.
2사단에 2년간 근무하면서 나는 수많은 해병대원들에게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봤다. 다양한 답변을 들었지만 가장 많은 것은 ‘힘들더라도 군 생활을 보람차게 하고 싶어서’였다. 즉 남들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이겨내겠다는 뜻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하고 번듯한 직장을 잡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인생에서 그 어떤 어려움도 없었고, 하는 일마다 다 잘돼 성공하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모두 그를 부러워했다고 가정하자. 언뜻 행복한 인생을 산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불행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에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니 반대로 진정한 행복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한 잔의 물이 선사하는 시원함과 소중함을 알 수 있겠는가? 참담한 실패를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성공의 기쁨을 알까? 연인과의 관계에서 이별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배신과 기만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고마운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역사상 위대한 위인들은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꽃을 피웠다. 죽음의 위협을 수차례 모면한 칭기즈칸은 이후 전 세계를 호령하는 정복자가 됐다. 베토벤이 남긴 불멸의 교향곡은 청력을 잃는 고통 속에서 창조됐다.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사형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난 이후 『죄와 벌』 같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으며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들도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순신도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하는 고난을 겪고 난 후,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구국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훈련 가운데서도 해병대 임무형 훈련 중 하나인 고무보트(IBS)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잠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한여름 폭염 속에서 진흙밭을 구르며 ‘악’ 소리를 내던 해병들. 훈련 중 많은 탈진 환자와 부상 환자가 군의관인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누가 봐도 훈련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 같은 상태인데도 그들은 결연한 목소리로 계속할 수 있다고, 절대 열외하기 싫다고, 훈련 받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상처와 훈련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강인한 정신력에 경의를 표한다.
강철은 높은 온도에서 망치에 수없이 얻어맞으며 단단해진다. 탄소는 높은 압력과 고온의 극한 환경에서 다이아몬드가 된다.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수많은 고통을 이겨낸 후 강철과 다이아몬드처럼 강해져 있을 해병대원들을 응원한다. <국방일보 병영의창 202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