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군 원로 손원일 제독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 제6대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금년 ’09년 기축(己丑)년은 창군 원로이며 우리 해군의 아버지이신 손원일 제독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또 해병대가 창설된 지 60주년 환갑의 해이며, 해군 창설은 64주년을 맞는 해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70퍼센트가 바다로 되어 있다. 지구 위에는 무한한 하늘이 있다.
우리 삶의 영역은 바다로 통해 세계로 이어져 있으며 바다에 우리 일터와 길이 있다. 바다를 지키고 개척하는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 해군과 해양 일꾼들이다. 후배 해군 장병들이 올곧은 정신 아래, 힘차게 싸우며 또 싸워서 이기는 강한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창군원로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초창기 선배들께서 피눈물 나는 고난을 극복해가며 맨손과 맨주먹으로 어떻게 이 모군을 일으켰나를 잘 알아야 한다.

손원일 제독과 같은 선각자를 그때 그 시절 창군초기에 만나게 된 것은 대한민국 해군이 하느님의 크나 큰 축복을 받은 군이라는 사실을 부연(敷衍)해 준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해양보국(海洋保國)을 손원일제독이 이어 받아 도도한 역사의 부름에 당당히 몸을 던져 주춧돌을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해군 국제관함식에서 한국 최초의 이지스함 등 최신 함정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파도를 가르는 가운데‘대양해군’의 위용을 자랑했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50여 년 전에 손원일제독을 모시고 박옥규 함장 일행과 함께 해군 장병의 갹출금, 대통령의 성금 등 그야말로 온 국가가 나서 마련한 국민성금을 손에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비롯한, 지금 생각하면 보잘것 없는 몇 척의 PC함을 구매 인수했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 해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지스 구축함을 선두로 국제 관함식을 개최하는 자리에 손 제독님이 함께 계신다면“얼마나 마음 뿌듯해하며 기뻐했을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손 제독 탄생 100주년을 맞는 이 기회에 하늘이 우리들에게 축복했던 그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손 제독께서 일생을 통해 보이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특히 해군과 해병대와의 뿌리에 대해 잠깐 거론하고자 한다.

 

▶ 바다를 지배해야 선진국 된다.


‘한 지붕 두 가족, 해군과 해병대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해병대가 있기까지 그 분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손원일 제독은 원래 부친 손정도 목사께서 해외에 계시면서 독립 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길을 권유했다. 하지만 손 제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미래는 바다를 어떻게 지배하느냐에 있다. 세계적으로도 모든 선진국들은 해양국가로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다. 경제활동을 해상에 의지해야 하는 이 시점에 해군의 증강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한 즉시 진해로 내려가 해군 창군에 모든 정열을 쏟아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초석(礎石)이 된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우리는 오늘의 해군이 있기까지 원동력이 되었던 손 제독의 멸사봉공의 추진력을 우리 후배들은 길이길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손 제독은 해군 창설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해병대를 창설하였고, 그 후 작은 소수의 해병대가 수많은 위기를 잘 넘길 수 있게 끊임없는 사랑과 지원을 해주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손원일 초대 교장으로 부터 수업을 받았고, 여순 반란사건 때는 작전경과보고를 하면서 해병대 창설을 건의하였다.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시는 손 총장님을 수행하는 명예를 가지는 등 그는 나의 군 생활 중 잊지 못할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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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임진강·장단 전선에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본인 공정식 해병제3전투단장 

 

더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병대가 겪는 고비 때마다 그가 베풀어 준 극진한 배려였다.

▶ 구국의 세 가지 혜안(慧眼)

 

나는 지금도‘손원일 제독께서 국가의 주요한 고비마다 선각자로서 혜안(慧眼)을 가지고 어찌하여 그 같은 결정을 내리셨을까’하는 세 가지 결단(決斷)을 골똘하게 회상한다.
먼저 첫째 결단은 6·25전쟁 발발 불과 1년 전에 해병대를 창설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1948년 여수 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손 제독은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380명으로 출발한 해병대가 오늘과 같이 성장한데에는 손 총장의 배려와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302 정장인 내가 여순 반란 브리핑에서 건의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해군은 총 병력 3천여 명에 함정세력도 소해정 등 아주 빈약한 처지에서는 해병대 1개 대대정도의 병력 규모 창설도 감히 어림없는 여건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의 해병대 창설 결단은 그야말로 한국을 사랑했던‘하나님의 기적’이던가 아니면 손 제독의 특별한 미래 예측‘혜안(慧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둘째, 그가 창설한 해병대가 해군의 요람인 진해군항과 임시수도 부산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한 사실이다. 전사를 살펴 설명해본다.
6·25전쟁 초기인 50년 8월 연전연패해 전 국토의 5분의 4가 유린당하던 때였다. 인민군 6사단과 7사단은 통영, 진동리, 마산, 진해 앞까지 침공하였다. 이때 한국 유일의 해군 군항인 진해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진해가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도 국군도 낙동강 전선 방어때문에 안중에도 없었다.
이때 손원일 총장이 창설한 해병대만이 통영에서 한국최초의 해군·해병대 단독 상륙작전을 펼쳐 인민군을 격파, 진해 군항을 사수하여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보답하였다. 이를 우리 해병대는 지금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해군에서 창설시킨 해병대가 진해 군항(軍港)을 유지시켰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 해군은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 김성은 해병대사령관은 훗날 최장수 국방부장관이 되어 옛날 해병대를 전폭적으로 배려한 손원일 제독처럼 구축함 도입과 고속정 조함 등 해군 현대화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여과 없이 설명하는 대목이다.

진행 군항을 지킨 김성은 부대의 영웅적 전투 결과, 적의 거제도 점령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진해는 물론 거기서 차량으로 불과 1시간 거리인 부산의 임시수도를 지켜냈다. 이러한 해병대의 공적은 곧 손원일 제독의 준비된‘혜안(慧眼)’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손 제독이 해병대가‘뚫리면 한국이 멸망한다는 부산’을 건져내 구국(救國)을 성취한 점이 그의 선각자로서 두 번 째 사례가 된다.

셋째, 손 제독의 결단은 그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이라는 유엔군 연합작전에 당시 걸음마 단계로서 보잘것 없는 해군, 해병대를 참전케 함으로써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해군 해병대가 연합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진가를 발휘하였음은 물론 대한민국이 승리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전후 긴밀한 한·미동맹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청에서 우리 손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우리 해군과 해병대가 국민의 군대로서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결국 손 제독의 선견지명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해병대 출신 김성은 부대가 진동리 전투를 마치고 파김치 같이 지쳐 있을 때 일이다. 낙동강 전선-안강-영천지구로 이동하라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만일 그 지시에 따랐다면 해병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손 총장은 김성은 부대장의 읍소(泣訴)에 가까운 휴식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진해로 이동해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또 개전 초기에 제주도 해병대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후 제주 출신 학도병 3천여 명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려는 국방부의 지시를 손원일 제독이 막고 이들을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이 일은 한·미 두 나라 해병이 형제 해병이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해병대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 항상 해병대와 함께 한 손원일 제독

 

6·25전사를 보면 손원일 제독의 해병대 사랑은 곳곳에서 들어 난다.
그가 인천상륙에서부터 104고지를 거쳐 서울 시가전까
지 신현준 사령관을 통하여 해병대를 진두지휘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는 매우 많다. 내가 서부전선 장단 사천지구에서 전투하던 때에도 치열한 상호 포격전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하여 최일선 엄폐 진지에서 그에게 브리핑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직접 지휘한 경우 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늘 해병대가 편하도록 보살폈다.
서울 탈환이후 육군 3군단 지휘 하에 엄동설한의 동해안 산악지구 작전을 마친 다음 김성은 연대장과 내가 우리 해병대 발전을 위해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를 원하자 손 제독은 흔쾌히 들어 주었다.
해병대에서 해군의 필요한 인사를 요청하면 손원일제독은 즉각 이를 실행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본인(공정식 해군 소령)을 필요한 인사라고 김성은 대령께서 요청하자 손 제독은 즉각 그 날로 해병대로 옮겨 주었다.
손원일 총장은 해병대에 관해서는 신현준 초대사령관을 비롯하여 역대 사령관들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위임하였고, 다만 해병대가 처리하지 못하는 예산 등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지원을 요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손원일 제독의 관심과 지원으로 성장한 해병대와 해군의 관계였으므로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맹기 제독의 해군참모총장 취임 후 전속부관들을 서로 교환했고 수시로 방문하여 친교관계를 유지하다가 그 직을 떠나 작고할 때까지 돈독한 우의를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처럼 모군 해군과 해병대가 긴밀히 협조하며 최상의 모범적 밀월(蜜月)관계를 가진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병대사령관인 나부터 손원일 제독의 뜻을 항상 기려 해병대의 뿌리는 해군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병대와 해군 모두에게‘해군과 해병대는 한 뿌리다’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해병대 장군 진급, 예산신청 등 해병대의 모든 문제도 해군참모총장실로 찾아가 의논하곤 했다. 이에 동기 친구였던 이맹기 참모총장은 미안해했다.
“나한테까지 오지말고 해병대사령관이 직접 처리하지.”
“해병대의 법적 상관은 미국의 해군성 장관격인 해군참모총장 당신이야.”
이렇게 나는 해군참모총장의 법적 위치를 지켜 주었다. 선례는 이어져 그 후임인 함명수, 김영관 해군참모총장
역시 해병대의 일이라면 최선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그들 역시 해병대와 해군의 관계가 손원일 제독까지
올라가는 뿌리깊은 관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3군 체제지만 해군에 2개 구성군

 

해병대는 해군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므로 해병대와 해군은 형제다.
하지만 이러한 끈끈한 전통의 해군과 해병대의 형제관계가 어찌된 일인지 전래에 이르러 소원(疎遠)해지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지금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떠올리며 두 조직의 단결을 강조하곤 한다. 해병대와 해군은 같은 뿌리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되며, 해병대의 전력증강과 발전이 바로 해군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우리 국군 조직법에는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되어있다. 이는 3군 체제 하에서 육·공군과 달리 오직 해군만이 해군과 해병대라는 2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해군참모총장은 미국의 해군성 장관역할도 가지고 있으므로 해군은 물론 해병대의 전력증강과 발전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선각자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이 같은 선진 미 해군, 해병대의 역학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틀 가운데서 해병대에 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해병대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무적해병’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강한 정신력과 함께 미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즉, 한국전쟁은 물론 베트남전을 수행하면서 미해병대와 똑같은 첨단 장비 등을 지원하는 등 군원을 아끼지 않고 스폰서 역할을 다해 주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육군보다 해병대가 최신 항공대를 보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미 해군의 군원으로 유지되었다.
전후 미 해군이‘전투함 해외 양여(讓與)제한’이라는 정책에서 한국만을 자유롭게 하여 PF, APD, DEDD 구축함 등을 이양한 것도 손 제독과 해병대 출신 김성은국방장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우방 한국 해군과 해병대의 재평가’계기가 되었다. 즉 우리 해군과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군원이 이루어졌고 해군과 해병대가 똑같이 발전의 도약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 해병대 스폰서는 해군, 지금이 해병 항공대 최적기

 

이제 자주국방 개념 도입과 경제발전 등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또 군 현대화와 더불어 한국 해병대의 스폰서는 미 해병대 대신에 우리 해군이 그 몫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 몫을 다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해병대 해체 당시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한 우리 해군은 해병대 편제 하에 있던 항공대를 비행장은 물론 항공기, 조종사, 정비사 등의 인원까지 모두 접수하여 이를 모체로 오늘날 해군 항공전단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항공전력이 전무했던 해군이 해병대 항공대를 희생하면서 까지도 해군의 오랜 숙원이었던 항공전력을 이룩하게 된 것을 해군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해군과 해병대가 한 뿌리, 한 형제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로 인하여 김포반도 및 서해 5개도서를 포함하는 광(廣)정면의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해병대가 헬기한 대 없는 항공전력이 전무한 앉은뱅이 해병대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임을 해군은 유념해야 한다.
해군참모총장은‘앉은뱅이 해병대’로 36년이 지나는 이제부터라도 헬기 한 대 없는 해병대의 스폰서 역할을 하여 숙원인 공지기동해병대가 될 수 있도록 조종사양성에서 진일보하여 명실공히 해병대 항공전력이 창설될 수 있도록 통수권자 및 국방정책 입안자들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킬 책무가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으로 국내외적으로 시끄러운 바로 이때야말로 해군이 해병대 항공전력 확보에 결단을
보일 최적기(最適期)이다.
나는 우리 해군과 해병대는 대한민국 안보의 큰 양축(兩軸)이며,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국민의 군대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제 우리 해군에도 제2, 제3의 손원일 총장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러한 소원은 군의 진정한 균형과 발전을 바라는 노해병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깊은 우려(憂慮)임을 감안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신속하게 해결될 것을 기대한다. [2009 해병대지]

  • 머린코341 2010.06.14 09:42

    해병대의 역사를 보면 해군과 해병대가 한 뿌리임은 인정하지만

    해병대의 해군 통합이후에 해군에서 지금까지 하는 행동을 보면 과연 한 뿌리가 맞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해병대의 발전에 부정적이며 반대를 많이해온 해군이 과연 한솥밥 먹는 식구가 맞는지......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젠 해병대에서 예산을 일괄 배정 받아서 해병대 사령관이 집행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병대가 독립이 된건 된것 같은데 5% 정도가 부족해 보이는것은 저만의 욕심인가요?

     

    칼 자루는 해군이 쥐고 있습니다.

    해군 수뇌부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님의 해병대 창설의 깊은 뜻을 헤아려

    부디 해군과 해병대가 동반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시기 바랍니다.

  • 운영자 2010.06.14 18:58

    뭔가 부족하긴 합니다,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합니다만 자세한 세부상황은 아직 모르겠고...

     

    저 역시 해군에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머린코님 말씀대로 과연 해군이 해병대를 같은 모군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듭니다.

    저도 나름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리를 하고 있지만 모두가 무조건 부정적견해보다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안들을 모색하여 대응해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희철 2010.06.14 21:33

    많이 좋아졌다고 봐야지요.욕심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무조건 독립만을 주장하는 그런대응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예전처럼 육,해,공,해병대식의 4군체제를 요구하는것은 사실 무리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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