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 이기훈(2008)
거닐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난다.
길가에 발로 차이는 돌멩이가 어릴적 던지고 놀았던 돌멩이로 변하며 난 추억 속으로 돌아간다. 동네 형들과 뛰놀며 산과들을 누비고 다니던 소싯적의 시절이 오늘은 산책하며 발에 차인 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난, 내가 어릴 때 참 바깥에서 많이 놀며, 달리기도 하고 산도 타고 한 것이 지금의 기초체력이 되었다며 사람은 자연속에서 살아봐야 된다며 너털한 자랑을 하며 앞서가던 친구에게 말을 걸어 본다.
친구와 난 거닐면서 잠시 컴퓨터에 사로잡힌 요즘 어린아이들을 한탄하며, 친구도 나의 추억속으로 들어오곤 한다.
거닐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난 추운겨울날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추운 날씨와 바람은 산책의 묘미와 철학을 방해한다.
어서 오늘 걷기로 마음먹은 동네 우체국까지의 거리를 서둘러 갔다 와야겠다는 마음만이 내내 앞선다.
겨울산책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나에게는 거니는 것의 중간과정을 생략해 버리고 일단 도착했다는 느낌, 그리고 차가운 바람을 잘 견디어 냈다는 일종의 뿌듯함만을 주는 두발만 움직였던 운동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제 봄이 되면 산책의 즐거움도 곧 나를 찾아오리라.
거닐다 보면............
논길을 거닐다 보면, 축축한 논둑길의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는다. 약간은 귀찮지만 조금 비린 듯한 물냄새가
논에서 풍겨 나온다. 아마도 민물고기에서 나는 듯한 비릿한 논의 냄새...
하지만 이 냄새를 역겨워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 더 크다고나 할까?
논길을 거니는 것은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을까? 라고 생각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이 가을 추
수를 앞둔 황금들판의 논길을 것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여름 논길을 가장 거닐고 싶다.
여름 논길은 재미가 있다. 내가 걸으면 개구리가 놀라 뛰고 덜 자란 벼들이 고개를 바싹 쳐들고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놈들도 비가 한번 크게 오면, 얻어맞은 사람처럼 풀이 죽어 누워있다. 이놈들이 사람은 안 무서워해
도 장마형님에게는 속수무책인 놈들이다. 여름 논길은 가을보다 시원하다.
객관적인 잣대를 대며 온도를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선 뭐 그리 할 말은 없지만, 원래 사람 느낌이란 것이 주관
적이라. 어쨌든 난, 여름 논이 가을 논보다 더 시원하다.
저 멀리 파도처럼 바람과 함께 푸른논이 철썩인다. 논둑중간에 있는 나를 지나 둑 넘어 푸른벼도 시원하게 철썩
인다.
가을엔 난 산길을 거닐어 본다. 안개가 끼면 산길 자체가 오묘하다. 마치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거닐듯, 구름속의
산책을 하듯, 안개 낀 날의 산길은 신기함으로 가득하다.
가을산은 커리어 우먼의 화장색이다. 갈색 톤으로 세련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심 속 커리어 우먼들의 자신 있는 걸음걸이와 도도한 자태가 산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
가을산은 단풍이 들고 나서 더욱더 요염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을 산길을 거니는 이유는 그 산을 정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흔히 등반가들은 산을 정복하
는 맛에 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등반이 오르기 힘들 기에 정복의 매력이 더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을산은 과
정자체가 슬슬 거니는 것의 연속이다.
목표를 가지면, 산길에 나타나는 자연의 섬세함을 결코 맛볼 수 없다. 특히 붉은색과 갈색 톤으로 때로은 은은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변화하는 이 산길은 천천히 거니는 자에게만 여유를 선사한다.
오늘 난 바닷길을 거닐었다. 가을도 아니고 봄도 아니고 여름이 다가오는 더운 봄 아니면, 덜 더운 여름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깨달았다. 난 겨울에 거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바닷
가에서는 겨울에 거닐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밋밋한 해풍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한숨가득 습기 먹은 해풍이 오늘 거니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
다. 차라리 겨울에 칼을 품은 찬바람이 거니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 때 그 나그네는 더욱더 서러움에 복받쳐,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게 아닐까...
겨울파도의 하이얀 포말도 서럽도록 드넓게 펼쳐진 바다도 바닷길을 거니는 나그네의 마음을 그토록 스산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파도가 몰고 온 차가운 바람이, 겨울산책에 날 빨리 걷게 했던 날카로운 바람이,
바닷길에 홀로 걷는 나그네의 마음을 울리는 감성 촉진제가 된다는 걸 오늘에야 깨닫는다.
거닐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난다.
논길은 유년시절을, 산길은 작은 반성을, 바닷길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산책이 습관이 된 나는 매일 출퇴근길을 여유 있게 거닐곤 한다. 퇴근길은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주고, 출근길
은 하루를 벅차게 해준다. 금요일 퇴근길은 일주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주 월요일 출근길은 한 주일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말 산책은 내가 충분하게 그리고 기분 좋은 휴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거닐다 보면 우리
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한 번 더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난 거니는 것이 좋다. [2008 해병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