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이병 해병대 교육훈련단
나는 3대 해병이다. 존경하는 할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버지, 이분들이 전역 후 지금까지 소속감·자부심을 갖고 있는 ‘해병대’라는 아우라 속에서 성장한 나까지. 어쩌면 해병대에 입대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 “해병대로 가겠다”고 했을 때 반대가 많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힘들어 다들 피하는 곳에 대를 이어 복무하면서 소명을 다한다’는 뿌듯함이 해병대로 이끌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해병대 사랑은 그대로 내게 이식됐다.
명절마다 찾은 할아버지 댁에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증’ ‘국가유공자증’ ‘화랑무공훈장’이 자랑스럽게 장식장에 올려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총 3회에 걸쳐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셨고 1968년 울진 대간첩작전에서의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으셨다. 어릴 때는 그저 ‘국가에서 인정한 증서’ ‘멋진 모양의 배지’ 정도로 여겼지만 국방의 의무를 깨닫고 성인이 되면서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됐다.
언제나 다정하면서도 올곧은 모습만을 보여 주셨던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따라 해병대 부사관으로 입대해 복무하셨다. 성격, 행동 습관, 삶의 태도 등 모든 것을 해병대에서 배웠다고 늘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병대 관련 뉴스를 보며 기뻐하고 걱정하시던 모습, 전우들과 함께 경조사를 나누며 친형제처럼 챙기고 서로를 아끼던 모습이 생각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해병대 정신과 끈끈한 전우애를 이어받고 싶어 해병대에 입대했다.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손자이자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같은 정체성을 갖고 멋지게 그분들 앞에 서고 싶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계절에 받은 신병훈련은 혹서기와 또 다른 한계점을 던져 줬다. 강인한 교육훈련에 더해 오락가락하는 폭우와 큰 일교차로 건강관리도 중요한 과제였다. 정신적 한계가 찾아올 때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버텼다. 그분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걷고 있다는 자부심은 축 처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어 줬다. 육체의 한계가 찾아올 때면 함께하는 동기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극기주 천자봉 고지정복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할아버지·아버지와 같은 ‘빨간명찰’을 가슴에 달았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손자,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격을 획득한 듯하다. 수료식이 기다려진다. 대한민국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게 될 손자를 향한 환한 미소, 아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를 얼른 받고 싶다. <국방일보 병영의창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