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를 사로잡은 해병대사령부 의장대 진해 세계 군악·의장 페스티벌 참가기 / 상병 권종욱/박영근
“예, 아버지. 4월에 내려가요. 진해 군항제 맞아요. 주윗분들한테 다 말하세요. 아들 창원 내려간다고.”
2011년 1월, 새해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 의장대에게 커다란 숙제이자 목표가 생겼다. “진해 세계 군악 의장 페스티벌”, 세계인의 축제이자 군악 의장대에겐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행사. 나에게 있어 한가지 의미를 더 두자면, 2년 남짓의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고향인 창원에서 멋진 모습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다.
의장대. 세 글자만으로도 느껴지는 누구보다 멋있는 군인. 남들이 보기에는 빈틈없고 화려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뒤에 숨겨진 수많은 노력과 고통이 있는 나의 부대. 해병대사령부 의장대. 우리들은 그렇게 4월에 있을 진해 페스티벌을 위하여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의장대는 이병 때부터 기본 21개 동작을 시작으로 정지간 제식동작, 이동간 제식동작, 개개인의 동작을 차례로 보여주는 파도타기 대형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 의장시범을 간부들과 선임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모든 동작을 익히고 어느 정도 다듬어지면 정예 21인조 시범열 동작조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처음으로 의장시범행사를 무리 없이 치르게 되면 빨간 ‘해병대 의장대’ 휘장을 왼쪽가슴에 붙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차에 따라 길게는 1년,통상적으로 10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특히 해병대사령부 의장대는 타군의 의장대와는 달리 M1소총을 사용하여 시범동작을 하는데. 바로 이 M1병기가 문제(?)다. 나무로 제작된 이 병기는 6·25전쟁 당시 전군이 사용했던 역사가 있는 병기이며, 대검 착검시 무게는 5kg에 육박하고, 길이는 1m 40cm를 훌쩍 넘는다. 다른 의장대가 사용하는 M16과 같은 병기보다 클래식한 멋이 있고, 묵직하기 때문에 좀 더 절도 있게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무거운 병기를 장난감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훈련 중에 팔은 물론이고 온몸에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는 일은 다반사이며, 기약 없이 힘들고 지루한 훈련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숙달된 대원들로 구성된 21인조 시범열 동작조는 5명의 군기수와 함께 행사조를 만든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군 관련 행사, 국내외 고위, 고관 및 귀빈의 환영, 환송 행사, 각종 전승 행사, 다양한 지역 행사 등을 군악대와 함께 다니면서 의장시범을 선보이고, 해병대를 홍보하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 중 진해 행사가 우리를 이토록 흥분시키는 것은 해병대의 대표이자 얼굴인 우리의 멋진 모습을 타 의장대 앞에서 뽐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선임들의 연이은 전역으로 시범열 동작조의 인원은 부족하기만 했고, 너무 추운 날씨 때문에 훈련 여건도 좋지 못한데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하루 7시간 과업시간 외에도 별도로 개인훈련을 실시 21인조 대형의 시가 행진 및 시범 동작을 맞춰보았다. 나 역시 당시 실력은 많이 미숙했지만, 진해 행사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급박하고 힘든 시기였다. ‘21명이 단 하나의 동작을 해야 하기에, 나 한명의 부진은 우리 모두의 부진으로 이어진다’ 라는 압박감에 부담감은 극에 달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손가락 염좌와 군데군데의 근육통으로 파스냄새가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나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부대의 선임들과 동기들, 그리고 후임들이었다.
훈련시간에는 호랑이 같기만 하던 선임들도 훈련이 끝나면 나를 따로 불러서 부족한 점이나 요령들을 짚어주고 격려해 주었다. 동기들과 후임들 역시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나의 꿋꿋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잦은 폭설로 인한 제설작업과 빠듯한 야간근무에도 지칠줄 모르고 지나가지않을 것만 같던 겨울도 그렇게 지나갔다.
“예, 이제 다음달입니다. 안 힘들어요. 계속 했던건데요 뭘. 엄마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아들래미 보면 깜짝 놀랄겁니다.”
3월이 다 되어서야 우리 정예 21명은 제법 구실을 갖춘 동작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는 보다 완성도 높은 동작과 완벽한 외적 자세를 갖추기 위한 행사 장구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새로 제작된 시범 병기도 모두 완성이 되었고, 철모, 탄띠, 전투화 모두 필요한대로 교체하고 보수하며 준비를 거듭했다. 진해 페스티벌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여러 행사들은 우리 진해 시범열 동작조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고,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이었다.
그때마다 간부님들과 선임들은 나와 우리의 부족한 점을 꼬집어 주었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래, 애들 다 연락했지? 내일 모레 간다고 이제. 안 오기만 해라. 나 평생 못 볼 줄 알아 그럼.”
4월 6일 33명의 의장대 대원은 기대반 걱정반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로 향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생각도 했지만 너무 큰 무대였기에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진해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우리 해병대 뿐만 아니라, 육·해·공군 각군 군악 의장대와 미국, 뉴질랜드, 태국 등 각 나라 참가팀들이 저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격을 기다리는 전투병 마냥 기세등등해 있었다.
리허설 공연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참가팀들은 서로 질세라 눈치싸움이 살벌했다. 서로의 공연은 실수를 잡아내기 위해 뚫어져라 지켜보고, 각자의 공연은 실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대망의 4월 8일, 힘찬 축포가 진해 세계 군악 의장 페스티벌의 개막을 알렸다. 공연은 주·야 간 의장시범 및 군악대 마칭 공연과 각 지역에 게릴라 콘서트 및 프린지공연, 그리고 시가행진 등으로 구성되었다. 해병대 의장대의 시범은 이튿날 저녁, 타군의 의장시범 공연을 보면서 우리 대원들은 모두다 서로 내색하진 못했지만 긴장감으로 인해 반쯤 공황상태였다.
대망의 본 의장시범 공연 당일, 우리 21명 전원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언의 기대와 서로에 대한 의지 속에 무대 앞에 올랐다. 문이 열리고 빛나는 조명 아래 시민들의 환호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보다는 몸이 동작 하나 하나를 하고 있었고, 21명의 호흡 속에 몸을 맡겼다.
15분. 나에게는 1년 아니 10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공연이끝났다. 박수와 함께 “해병대 최고”라는 찬사로 가득했다. 타군 의장대 역시 결실을 맺고 나온 우리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축하를 보냈다.
모두 비슷한 훈련과 노력을 했기에 서로만이 알 수 있는 진심어린 ‘위로’였다. 복장을 풀고, 관람오신 아버지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는 나를 꼭 안으시고는 다 알고 계신 것 처럼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의 그 말에 경험해 본적없는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다. 우리 모두는 함께 환호하며 서로를 부둥켜 안고 축하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본 의장시범 공연을 필두로 두 번의 시가행진과 프린지 공연, 그리고 또 한번의 의장시범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어딜가나 “해병대! 해병대!” 의 함성이 들렸고 어디서나 해병대는 최고였다.
그렇게 진해축제는 우리들의 축제가 되었다. 모두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폐막식과 함께 모든 식순이 끝나자, 무대 위에 있던 모든 군악 의장대는 흩날리는 꽃가루 아래에서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동료’라는 마음으로.
의장대.
남들은 말한다. “매일 총만 돌리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 고. 우리들은 말한다. “매일 돌아가는 총의 바퀴 수만큼, 우리의 심장은 뛰고 있다고.”
해병대를 알리기 위해. 해병대를 위해. 오늘도 우리는 빨간 훈련모를 쓰고 땀으로 물든 M1병기를 들고 훈련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