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 세워진 인천지구전적비. |
|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참전비. |
|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6·25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수세에 놓이게 되며 전쟁은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세계 전쟁사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을 찾았다. 꽤 쌀쌀한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지만 6·25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적지를 둘러본다는 기대감에 발길은 빨라졌다.
먼저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들렀다. 인천 시민이 즐겨 찾는 이곳은 전시실과 영상실, 자유의 수호탑 등이 있고 대표적 안보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시실에는 당시 전황판과 상륙작전에 관계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고 디오라마를 통해 리얼하게 작전 상황을 소개하고 있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전장 한복판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실제로 접하고 난 뒤 이곳을 떠나 오늘의 목적지인 인천지구전적비가 있는 수봉공원으로 향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의거했던 순국선열의 넋을 위로하는 ‘현충탑’(72년 건립), 6·25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 도쿄·오사카·규슈의 유학생 280명이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것을 기리는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79년), 인천에 사는 이북 실향민이 매년 고향을 향해 제례를 지내는 ‘망배단’(88년), 인천·도쿄 라이온스클럽이 유엔군과 재일학도의용군의 정신을 되새길 목적으로 세운 ‘자유와 평화의 탑’(81년) 등이 수봉공원 이곳저곳에 있었다.
수봉공원이 있는 수봉산은 50년 9월 15일 월미도와 만석동·송도해안으로 상륙해 시가전을 벌인 끝에 인천을 탈환한 아군이 서울로 진격을 개시한 곳이기도 하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대규모의 세심한 준비를 했고 최초 상륙부대로 미 제1해병사단을 지정하고 상륙 이후 미 제7사단이 뒤따르게 돼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해병 제1연대와 보병 제17연대도 후속 부대로 참가하게 돼 그 규모는 항공모함·구축함·순양함 등 8개국 261척에 각종 지원부대를 포함하면 7만5000명이라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완벽한 기습으로 이뤄진 작전은 치밀한 지형분석과 정보 수집을 통해 통쾌한 승리로 연결됐으며 세계전쟁사에 성공사례로 아직도 전해져온다.
‘광란의 성풍이 문득 북에서 불어와 이 산하 피로 물들이던 날 만방의 자유민이 분노하여 뭉쳐 모여 전사에 길이 남을 승전고를 울렸으니… 함께 새겨진 혈맹의 우의와 호국의 의지 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남구 용현동 55-183번지에 12.59m의 높이로 우뚝 서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천지구전적비에 새겨진 비문이다.
80년 9월 15일 인천시가 이 지역 전투에서 산화한 유엔군과 국군장병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천지구전적비는 2005년 5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돼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의 산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곳은 인근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어 지역주민들에게 정다운 쉼터이자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만난 김용현(72·인천 용현동) 씨는 “체육시설이 잘 돼 있어 산책과 운동하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며 “특히 인천지구전적비와 참전비 등이 있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선열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평일임에도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 공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지구전적비는 여느 전적비와 달리 그리 외롭지만은 않아 보여 기자의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국방일보 글·사진=이승복 기자 yhs920@dem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