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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 파편 53년… 죽어서야 끝난 고통 

《2005년 74세를 일기로 작고한 6·25전쟁 참전용사 이학수 씨는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문자 그대로 몸에 안고 산 증인이었다. 1952년 경기 사천강 부근에서 벌어진 장단지구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그때 머리 속에 박힌 중공군 포탄 파편을 53년 동안 지닌 채 살았다.》


장단지구 전투서 부상… 수술도 못해
5년전 장례식때 1cm크기 조각 거둬
통증에 눕지못하고 벽에 기대 잠자
병상일기엔 전우애-입원생활 생생


이 씨의 가족은 그가 사망한 뒤 화장하는 과정에서 파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지름 1cm 크기로 바둑알 모양의 금008846.jpg속물체였다. 몸 밖으로 나온 뒤 산화한 때문인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이 씨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한 가족은 2005년 말 파편 1개와 이 씨가 경남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했던 1953년 작성한 병상일기 한 권을 기증했다.
이 씨의 아들인 이병기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원은 1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해병 1연대 소속 병사로 6·25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한 뒤 고향인 경기 화성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 들려줬다.
1931년생인 이 씨는 고교를 졸업한 뒤 경찰(순경) 생활을 하다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해병대에 자원입대(병 8기)했다.

이 씨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전투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판문점 주변인 임진강과 사천강 지역 사수를 위해 치른 장단지구 전투였다. 

이 씨는 장단전투에서 동료 소대원 대부분을 잃었다. 자신과 동료 1명만 살아남았다. 이 연구원이 들은 아버지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이 씨는 포탄이 터지면서 머리를 다치면서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그는 다리를 다쳐 걷기 어려운 동료를 등에 업고 그 동료의 시력에 의존해 후퇴했다고 한다. 이 씨는 치료를 통해 시력을 회복했다.

이 씨는 진해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의 소속 부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연구원은 “정부 기록도 없다. 아버지가 예전에 뭔가를 말씀하셨겠지만 우리 가족도 구체적인 부대 이름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1연대 소속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1953년 10월 상병(당시 호칭은 삼등병조)으로 명예 전역한 이후에도 이 씨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통증 때문에 똑바로 누워 잠들지 못했다. 그는 “통증과 울렁증이 좀 낫는 것 같다”며 머리를 늘 벽에 기대고 지냈다.
이 씨는 농사를 짓는 육체노동의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었던 것 같다고 이 연구원은 말했다. 늘 진통제를 먹어야 했고, 60대 이후 세월의 3분의 1은 병실에서 환자로 지냈다고 한다.

008845.jpg이 씨는 X선 촬영을 통해 자신의 머리 속 파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두개골이 파손돼 파편이 박혔는지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에 만난 의사들은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적출 수술에 반대했다.

이 씨가 남긴 100쪽 가까운 병상일기에는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굵은 만년필로 빽빽이 쓴 일기장의 첫머리엔 ‘生死苦樂(생사고락) 같이하던 戰友(전우)’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단기(檀紀)로 표시한 날짜(4286.07.10.)도 붙어 있다. 1953년의 글이었다.

“砲口(포구)가 울고 종일 울든 長端(장단) 전초전에서 … 情(정)들인 戰友(전우)를 육척고지 上峰(상봉)에다 헌신짝 버리듯 던져버리고 … 장기간 同(동) 중대에서 일상생활을 하였음에도 자각지 못하고 오늘날 病床(병상)에서 알게 되자 또한 머지않아서 작별이란….”

같은 중대원이었으나 병상에서 처음 만나 ‘신형(申兄)’이라고 부른 동료 장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글이었다.
병상일기에는 무료한 입원생활을 달래기 위한 것인 듯 국내외 유행가 가사도 다수 담겨 있었고, 펜으로 그린 군복 입은 병사, 시골마을 풍경 그림도 눈에 띄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 소식을 듣고 ‘환영한다’고 쓴 내용도 담겨 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개전초 민간병원 北넘어가 의무기능 못해
스웨덴등 5개국 의무병력 지원후 상황 호전


008844.jpg전쟁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의무부대의 활약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의 의무 기능은 극히 미약했고, 개전 초기에 상당수의 민간병원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 전쟁 지원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1950년 7월 야전의무단이 창설되고,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인도 등 5개국이 의무 병력과 의약품을 지원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해 여름 치렀던 낙동강 방어전투 이후로는 전상자들을 적기에 치료할 수 있었다고 군 당국은 설명한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육군병원은 전쟁 발발 전 6곳에 불과했지만 1950년 말 13곳으로 늘어났다. 환자 수용 능력도 정전협정에 서명할 시점인 1953년 7월에는 육군병원 17곳, 야전 의무대대 3곳, 이동외과병원 3곳으로 늘어났다.
오금순 씨는 1993년 한국전쟁기념관 개관에 맞춰 6·25전쟁 때 사용한 핀셋과 가위, 소독함 등 3점을 기증했다. 간호장교 출신인 오 씨는 기증 당시 “이 의료기구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부속 구호병원(경남 거제)에서 사용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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