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6ㆍ25전쟁 당시에 중공군의 대공세는 모두 7회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 휴전직전이던 1953년 7월에 금성천 일대에서 벌어져 휴전협상에서 주도권을 쥐려했던 7차 공세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세는 1950년 10월 참전한 이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월 한차례씩 벌어져 1951년 5월의 6차 공세까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을 보였습니다.
[중공군의 공세는 1951년 6월을 끝으로 일단 막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6차 이후 7차까지 휴지기가 길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을 승리로 끝내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6차 공세이후 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4후퇴를 불러온 3차 공세까지 연이어 성공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중공군은 자신감이 가득 차 유엔군의 휴전제의를 거부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전력을 수습하고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한 아군의 저항에 그들은 희망을 접어야 했습니다.
1951년 봄에 연이어 벌어진 4~6차 공세는 상당히 격렬하였지만 중공군은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들만큼 많은 피해를 보았고 결국 아군의 반격에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중공군은 지금처럼 인해전술을 앞세운 공세로는 더 이상 아군을 제압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전략을 완전히 수정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접은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약점이 노출되자 더 이상 피해를 감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포기하였다는 것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중공군도 어느덧 휴전을 생각하였고 그러기위해서 자신들이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종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사실 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산악이 많은 한반도에서 좀 더 상대를 감제하기 쉬운 고지를 선점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공세만 하던 중공군이 방어를 위해 더 깊게 참호를 파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한 아군이 1951년 6월초, 현재의 휴전선과 얼추 비슷한 곳에 설정한 와이오밍선까지 전선을 걷어 올리고자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아군이 화천과 양구 일대에 커다란 돌파구를 만들어 버리자 당황한 공산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해안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광치령-대암산-도솔산-대우산을 연하는 산악능선을 선점한 다음 지뢰를 매설하고 참호를 파서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북한군은 도솔산 일대를 요새화하였습니다.]
모양을 빗대어 이른바 펀치볼(Punch Bowl)로 불린 해안분지는 여의도의 6배 정도가 되는 넓은 땅이지만 만일 공산군이 장악한 남쪽 능선을 확보하지 못한 체 휴전을 한다면 이곳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아군은 공산군의 방어선을 점령하여야 했고 격전은 예고되었습니다. 사방이 1000미터가 넘는 거대 봉우리로 연결된 능선 중에서도 핵심은 북쪽 능선을 좌우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도솔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서 불같은 투혼을 보여준 역전의 용사들인 미 해병 1사단 5연대에게 도솔산 점령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반면 이곳을 막기 위해 동원된 부대는 후방에서 재편과 훈련을 마친 북한군 12사단이었습니다. 연일 공군의 맹폭과 포병의 무시무시한 불벼락이 도솔산에 퍼부어질 만큼 화력은 미군이 강하였지만 고지의 최종 점령을 위해서는 네발로 기어 올라가야 했으므로 위치를 선점한 북한군이 절대 유리하였습니다.
[도솔산 인근에서 바라본 해안분지]
적들은 땅굴 속에 몸을 숨긴 체 포격을 회피하다가 아군이 정상 가까이 올라오면 참호로 튀어나와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상륙전에는 귀신이었지만 첩첩산중의 고지전에서는 능숙하지 못하였던 미 해병 5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구원투수로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되어있던 국군 해병 1연대가 나서게 되었고 그것은 전사에 영원히 빛날 신화가 쓰여 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김대식 대령이 이끄는 해병 1연대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 후 6월 4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미 강력한 방어선을 완비하여 놓은 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반격을 가하는 북한군 12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번번이 막히면서 6월 10일까지도 목표물을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워낙 험준한 고산준령이다 보니 도솔산은 단지 의지만 가지고 있다고 점령할 수 있는 그런 목표물은 아니었습니다.
잘못하면 미 해병 5연대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한 김대식 연대장은 적이 충분히 예상하는 방법으로 공격을 재개한다면 결국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리라 판단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산악 고지전에 대한 사고방식이 미군과 중공군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를 반대로 역이용하면 적을 쉽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미 해병 5연대가 공략에 실패하자 대한민국 해병대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미군은 주간에 공격하였는데 그 이유는 적보다 강점인 화력의 우위를 보장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강력한 화력으로 목표물을 초토화시킨 후 보병이 진격하여 탈취하는 방법을 미군은 주로 구사하였고 미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병력에서 앞선 중공군은 유엔군의 화력지원이 제한을 받는 심야에 수많은 병력을 일제히 침투시켜 목표물을 공격하는 방법을 선호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적들이 야간에 아군이 공격해오리라고 예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야간 공격을 결심한 김대식 연대장은 미 해병 1사단의 토마스(Gerald C. Thomas) 사단장에게 의견을 개진하여 우여곡절 끝에 승인을 받았습니다. 6월 11일 02시, 아무런 지원도 없이 은밀히 이동을 완료한 후 해병 1연대가 공격을 가하자 적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김대식 연대장의 판단은 적중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전투 종결 후 격려차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김대식 연대장]
그동안 수차례 반복된 한미 해병대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적의 진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공격 개시 불과 3시간 만에 도솔산으로 향하는 관문인 대암산을 신속히 확보하면서 성공적으로 서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한국 해병대의 작전을 반신반의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토마스 미 해병 1사단장은 전과에 고무되어 즉시 도솔산을 공략하라고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자신감을 얻는 해병 1연대는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대암산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공격 루트는 깎아 지르는 협소한 외길 능선 밖에 없어 무턱대고 진격하다가 커다란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아직까지는 적들이 위치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식 연대장은 고지의 적들도 결국은 고립된 환경이므로 출혈을 강요하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아군을 일거에 투입하지 않고 예하 3개 대대가 교대하면서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산에서도 신화를 썼습니다.]
한 곳의 공격로로 축차 투입되는 형식이므로 아군의 상당한 피해도 예상되는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6월 15일 아침 2대대가 공격을 도솔산으로 향하는 진격을 개시하자 적 12사단은 완강히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점점 커졌으나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고 즉시 뒤에 있던 다른 대대가 전면으로 나서 공격을 지속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쉼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더 어려움을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는가의 싸움이었습니다. 비록 북한군은 위에 있었지만 해병 1연대의 3개 대대가 쉬지 않고 교대로 공격에 나서자 소모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무시무시한 포격과 공습이 북한군 12사단으로 향하는 보급을 제한시켜 버리자 고지를 사수하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졌습니다. 병력의 보충은 물론 총알과 식량, 식수가 바닥난 북한군은 항전할 의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솔산 지구 전적비]
결국 아군의 집요한 공격에 6월 19일 북한군이 도주함으로써 치열했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비록 해병 1연대는 123명이 전사하고 400여명의 부상당하는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북한군 12사단은 3,000여명을 사살되어 전투력을 상실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이렇게 확보한 도솔산으로 말미암아 해안분지를 아군이 감제할 수 있게 되면서 북한 측 방어선을 해안분지 북쪽으로 10Km정도 걷어 올려 버리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해병 1연대의 쾌거를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휘호를 하사했는데 이것은 이후 해병대를 상징하는 구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해병대의 5대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 도솔산전투는 바다를 통해 적진에 상륙하는 위험한 작전을 고지에서 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의 격전이었는데 이후 한국 해병대의 무한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끝//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