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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삼등병조 이창환(1929. 8. 5 ~ 1950. 11. 20)

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원산 동양리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산화한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현 하사)를 11월의 호국이창환_01.jpg인물로 선정하였으며, 지난 11월 5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를 가졌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는 1929년 8월 5일 경북 경산군 진량면 다부동에서 이종수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가 소속된 해병대 3대대는 1950년 11월 평양 ~ 원산간 도로를 차단하고 준동하는 적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날로 강성해짐에 따라 평양~ 원산 도로를 위협하던 적은 증원되어 당시 동양리~ 마전리 도로 통로 부근에는 적 패잔병 3,500여명이 잠복 중에 있었다.
11월 20일에 해병대 3대대는 대대규모의 적 패잔병들이 원산 ~ 평양 간 도로의 요충지인 동양리 일대를 장악하여 도로를 차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러한 적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제11중대를 출동시켰다.
제11중대장(박동열 중위) 가 출동할 시 1소대 2분대를 지휘하는 이창환 삼등병조가 첨병분대를 자원하였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는 첨병분대장으로서 전진 중에 돌연 중화기를 소지한 적 200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11중대 전원이창환.jpg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분대장은 첨병분대를 지휘하여 과감히 적 진지에 돌입하여 중화기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를 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중대는 완전히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위기에서 탈출하였다. 이창환 삼등병조가 지휘하는 첨병분대의 활약이 없었다면 수적으로 불리하고 이동중에 적에게 노출되어 있던 11중대는 자칫 매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잘 극복하였다.
이후 적 패잔병들은 중공군이 장진호전투를 개시할 무렵인 11월 하순에는 이를 지원할 목적으로 동양리와 마전리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때 동양리의 해병대 3대대는 고립되어 보급지원마저 받을 수 없는 위기상황을 맞았으나, 이창환 삼등병조의 살신성인 정신을 본 받아 감투정신을 발휘한 결과 원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3사단과 연결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
다.
이창환 해병 삼등병조가 몸소 보여준 살신성인의 자세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영원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해병대지34호>

글∙사진 / 사령부 정훈공보실


  1. 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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