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공격을 8월에 접어 들면서 약간 저하되고 대략 낙동강을 중심으로 적군과 아군이 대치하는 상태에서 동부전선은 포항을 중심으로 하여 중부에서는 왜관 등지에 혈전이 여전히 반복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마산과 진해, 부산을 위협하게되었다.
전투상황
진동리 지구의 적은 매일 증강되는 유엔군의 철통같은 방어작전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대로,마산, 진해, 부산등을 손아귀에 넣을수 없음을 알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통영으로 돌려 견내량 해협을 건너 거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마산과 진해는 해상으로부터 봉쇄되며 양지역은 적의 사정거리에있게 되는 것이었다. 8월 15일미명을 기하여 북한군 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대대 약 650명이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하였고 이날 17:00시 경에는 그 선두가 통영읍 북방 3킬로미터 지점인 통영반도로 통하는
가장 좁은 지대인 원문고개에 침투하였다. 이때 경찰관 약 100명이 원문고개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적의 공격을 감당치 못하고 야음을 이용 통영을 포기하고 한산도로 철수하여 버렸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1950년 8월 16일 해군참모총장은 김성은 부대로 하여금 즉시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참투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에 따라 2척의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밤 10시경 군항을 출항했던 김부대장은 이튿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동쪽 기슭에 이르러 자신이 세워놓은 북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즉 먼저 2개조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통영시가지 쪽과 거제도 서해안 쪽의적정을 살펴본 그는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던 까닭은 불과 기백명의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단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호를 비롯한 수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長坪里)에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그 이튿날 새벽 통영시가지를 감제(瞰制)하는 시가지 동쪽의 망일봉을 선제점령하고,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통영의 적을 돈안에 든 쥐를 때려잡듯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끝네 마침내 작전명령의 변경을 승인 받게된 김성은 부대장은 703호 함장과의 협의를 협의를 거쳐 PC-703호와 소해정 504, 901, 302, 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고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
계획대로 그 이튿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점령하여 한발 뒤늦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 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응원병력을 지원받은 다음 그 다음날(8.19) 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통영 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게 되었다.
작전의의
통영지구 작전은 해병대가 단독으로 해군 함정의 지원하에 수행한 작전으로서 유엔군이 방어에 급급할 때 국군의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전의 성공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이 작전은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그리고 9.23 원문고개를 찾아온 외신 종군기자(UPI통신)로 부터 "귀신잡은 해병"이란 명칭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 적의 수중에 들아간 국토를 처음으로 되찾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