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380명의 소수 병력으로 창설된 이래, 50년간의 역사 속에서 조국과 해병대를 위해 수많은 목숨과 피, 땀과 눈물을 바친 선배 해병들의 투혼으로 국가와 민족 앞에 자랑할만한 전투사를 남겼다.
우리 해병대는 6.25동란 발발 직후 장항, 군산, 이리지구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된 이래, 진전에서는“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창조해냈으며, 낙동강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미 해병대 제1사단, 미 육군제7사단,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1950년 8, 9월 그 당시, 북한군이 아군의 최후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 대하여 마지막 발악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유엔군의 맥아더 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고,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어,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구상을 갖고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크로마이트]로 부른 이 작전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며,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감행하여,서부전선과 중동부전선의 북한군을 섬멸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연합상륙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두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제1단계는 인천항의 주요 목 부분인 월미도를 선점하고, 제2단계로 인천 지역에 상륙하여 시가지를 소탕하고 해안두보를 확보하는 개념의 작전이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도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하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 1일 제주도를 출항, 9월 6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으로 단기간 특수훈련을 실시한 뒤, 9월 12일 미 LST Q3호와 피카웨이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인천으로 항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9월 4일부터 10일까지 선견부대 작전으로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이내 도로, 교량, 터널, 철도 등 교통의 요충지를 차단하는 항공폭격을 감행하였고, 9월 12일부터 서해안은 군산, 동해안은 삼척과 장사동 일대에 양동작전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이 전개되었다.
유엔군 제7합동 상륙기동부대는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 전함‘미조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한국해군함정 11척을 포함 총 261척으로 구성하였으며, 연합상륙군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작전에 참가한 총병력은 7만 5천 명으로,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 동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여대 항공기의 항공폭격과, 화력지원 함정의 함포 지원하에,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하였다.
제1단계는 월미도 선점작전으로 9월 15일 0시를 기해 미 해군 클라크 대위, 육군 계인주 대령, 해군 연정 소령, 최규
봉 KLO부대장 외 2명의 특공대는 팔미도에 침투하여 팔미도 등댓불을 점화한 후, 등대에 성조기를 걸어놓은 것을 신호로 해군 공격전대는 협수로를 통하여 인천항으로 접근한 후 9월 15일 06시 30분 로켓포함이 월미도의 녹색 해안을 강타하는 동안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M26전차의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여 상륙 후 1시간 만에 월미도를 확보하였다.
한국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신현준사령관(당시 대령)
제2단계는 인천 일대에 해단 두보를 확보하는 작전으로 당일 17시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인 만석동 지역으로 상륙하여 5m의 암벽을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상륙을 감행하였고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돌격 장갑차로 청색해안인 송도해수욕장의 서부 지역으로 상륙하여 상륙돌격 장갑차에서 사다리를 타고 5m 암벽을 넘어 상륙을 감행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제8사단 및 31사단을 격파한 뒤 해안 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속 제대로 9월 18일 미 육군 제7사단과 9월 24일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해병대 김성오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한·미 해병대가 함께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 8군은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9월 15일 17시 30분에 적색해안인 인천 만속동해안에 상륙하여 9월 16일부터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은 경인철도를 경계로 남쪽에는 해병대 제3대대가 응봉산 일대의 도심지역을 소탕하였고, 북쪽에는 해병대 제1대대가 담당하였다.
북한군은 인천지역을 벗어나 대부분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상당수가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하여 주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해병대 제3대대는 응봉산과 하인천역을 경유하여 시청을 탈환하였다.
인천시청 탈환시는 국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천시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용사들을 보고 적
치하 3개월간 고통과 설움이 북받쳐서 소리내어 울거나 살아남은 기쁨에 흥분하여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인천시가지에는 태극기의 물결이 점점 불어가고 있었으니, 이 어찌 감격의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인천경찰서로 진출한 해병대 제3대대 용사들은 북한군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구치소 안에서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으며 인천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으로 시가지 소탕작전을 마치고 도원공원에 집결하였다.
한편, 해병대 제1대대는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를 경유, 송림동을 거쳐 현 선인학원까지 진출하여 시가지소탕작전을 마치고 야간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한국해병대의 신속 과감한 소탕작전으로 인천시의 질서와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9월 17일에는 인천을 완전히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시가지는 적치하 3개월간 약탈과 방화, 학살 등 북한군의 마지막 만행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미 해병대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인천시를 긴급복구하기 위하여 9월 18일 오후 초대 임시 시장취임식을 거행하여 상륙군 사령관 명의로 표양문씨에게 시장 임명장을 수여하고 인천수복의 기쁨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은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하여 북한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9월 20일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으며, 서해안의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 등의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며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여세를 몰아 수도 서울을 조기 탈환하여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 함으로써 90일간의 적치하에서 고통과 실의에 빠진 인천과 서울시민에게 자유를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치적 심리적으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고, 북한군의 병참선차단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투의지를 상실하게 하여 총반격 작전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산 1만 4천명, 포로 7천 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미 해병
대 제1사단 2,450명, 한국 해병대 4백여 명,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 35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내었다.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인천상륙작전은 인천과 서울에서 공산군을 몰아낸 정의의 작전으로 한국전쟁을 수세에서 공세로 완전히 반전시킨 역사적 작전이며, 만약 인천상륙작전 없이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감행했더라면 많은 시간과 우군손실이 있었을 것이며 공산치하에서 더 많은 인천 및 서울시민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한·미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했을 때 인천시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그들의 해방군을 환영하였고,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인천과 서울 시민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미 해병 1사단(전사 415명, 부상 2,029명, 실종 6명) 한국 해병대(전사 97명, 부상 300명, 실종 16명)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전사 66명, 부상 272명, 실종 47명) 등의 4,000여 명의 병력손실이있었다.
이분들의 희생정신으로 세계의 국제도시로, 아시아의 허브로 도약한 오늘의 인천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으며 인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수많은 한국과 유엔군의 젊은이들이 흘렸던 고귀한 생명과 피의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령부 군사연구과장 / 역사과장 3급 강창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