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 1949년 4월 15일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 · 순 반란사건의 전훈에 따라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 4. 15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1949. 5. 5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모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949. 8. 1장교와 하사관을 해군에서 증원 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모하여‚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였다.
진주주둔(1949. 8 ∼12)
해병대 김성은 부대(약1개 대대)는 1949년 8월 29일 진주로 이동하여 약 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 “백성 없이 전투 없다”는 표어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 치안확보‚ 민심수습‚ 선무공작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지리산을 근거지로 진주지역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 소탕 작전을 실시하여‚ 진주지역을 완전히 평정함으로써 해병대를 처음으로 국민에게 알렸다. 해병대창설배경 10·19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노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대한민국의 해병대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와 같이 해병대는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지리적 여건과 10·19여순사건 등으로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며, 해병대의 창설을 뒷받침한 법령은 49년 5월 5일에 공포된 대통령령 제88호였다. 그런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1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2조)라고 되어 있던 그 1,2조 중 해병대의 임무를 규정한 제2조는 6·25동란중인 52년 8월 16일에 개정 공포된 대통령령 제672호에 의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이 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임을 명문화되었다.
해병대가 정식으로 창설되기 이전부터 해군에서는 해병대가 반드시 창설된다는 신념하에 상륙전의 경험이 있는 안창관 소위, 김낙천 소위 등 30명으로 편성된 작업선발대를 앞으로 해병대의 기지가 될 진해 덕산 비행장에 파견(1949.2.21)한 바 있다.
파견대장 안창관 소위는 이들 선발대를 중심으로 연병장을 닦고 병사로 사용할 부서진 격납고를 수리하는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연병장을 닦는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격납고를 수리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동년 3월 28일 해군에서 전입된 장교및 하사관과 신병 등 총 380명으로서 보잘것 없는 여건속에서 열과 성의로써 새 역사의 창조와 조국수호의 강병육성을 위해 온갖 애로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갔다.
“해병대”최강부대 380명 창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1949년 4월 15일 대망의 해병대가 창설 되었다. 이날 신현준 사령관은 "해병은 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 유사시에 대비 할 최강부대를 이루도록 교육훈련에 정진하자"는 훈시로써 장병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 하는 역사를 창조 할것" 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한국해병대는 국군 중에서 최강부대로 육성하겠다는 신념으로 해병대의 질적, 양적 확충을 도모하였다. 이때의 우리 해병대는 사령부요원 15명, 근무중대 70명, 정보대 10명, 2개소총중대 270명 등 380명 으로 편성되었고, 사병은 해군신병 13기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1기생(303명)이 근간이 되었다..
그 후(8.1) 해군신병 14기 중에서 인수한 해병대 신병 2기생(440명)이 새로운 해병대 가족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훈
련방식은 일본의 해군과 육전대식 그리고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고, 장비는 모두 일본 99식 총이었으며, M1 소총은 교육용으로 1정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천자봉까지 완전무장하여 휴식없이 구보로 정신력과 인내력을 배양 하였고, 단체훈련과 경기 등으로 심신을 연마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우수한 해병대 장교의 육성을 위해 사관후보생 30명을 태능의 육군사관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을 이수, 해간 1기생이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