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주둔(’49.12∼’50.7)
해병대는 1949년 12월 29일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읍 부대와 모슬포 부대로 증편하여‚ 한라산을 중심으로 준동하는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4·3사건 뒤 전화가 회복되지 않았으며‚ 군에 대한 원한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해병대는 초기에 공비토벌 작전보다 선무공작과 민심수습으로 의료진료 시설 복구‚ 농번기 대민 지원‚ 주민 계몽활동을 실시하여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들에게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생활면에서 안정을 되찾도록 인도하였다. 특히‚ 제주공비 토벌작전은 육군 제9연대와 제2연대‚ 경찰‚ 서북청년단이 토벌하지 못한 한라산 공비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해병대 군가제정(’49.9)
「나가자 해병대」해병대 군가는 창설 초기 독특한 해병대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자‚ 해병대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1949년 9월에 군가제정위원회에서 제정하였다. 신영철 해병의 작사 초고를 수정하여‚ 「나가자 해병대」가를 최초의 군가로서 제정하였고‚ 김행래(당시 경찰악대장)씨가 작곡하였으며‚ 다시 이병걸씨가 군악으로 편곡하였는데‚ 한국전쟁 시 ‘해병혼’과 ‘정신’을 갖게 한 해병대 군가로 부르게 되었다. 창설기 교육훈련 신현준 사령관은 창설당시 훈시를 통하여 정병 육성을 강조하면서‚ 교육훈련 이념을 제기하였다.
첫째‚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 “민에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
셋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하였다.
창설기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 혼’과 ‘정신’을 주입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 시 상승불패의 해병대 정신을 갖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정신적‚ 육체적 도장으로 삼아왔던 천자봉 구보와 행군은 오늘날까지 해병대 장병들에게 긍지를 갖게 하는 훈련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