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와 한국전쟁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원하는 구국의 선봉군으로 진동리 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어냈으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북진의 혈로를 타개하였고‚ 9월 20일에는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었다.
동년 10월 7일 북진의 선봉이 되어 원산·함흥지역에서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잠시 철군하였고‚ 1951년 1 · 4후퇴 시 재 반격 작전을 개시하던 중‚ 동부 전선의 도솔산 지구 전투와 펀치볼(김일성 고지)지구 전투에서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인이 경탄할 공훈’ 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동·서해안 전략 도서 확보 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아래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3월 중 ·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및 연천지구 전투를 1년 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완전히 저지하고 휴전을 맞이하였다.
장항·군산·이리지구전투(’50. 7 .15∼7. 21)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는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제 13연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제주기지를 떠나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의 금강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진동리 지구 전투(’50. 7 .31∼8. 13)
’50. 8. 3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의 예봉을 꺾어 침공을 저지하였으며‚ 창군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워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동년 8월 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특수임무부대가 진주고개로 지향된 대규모 반격 작전(1950.8.7 ∼ 8.12)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진동리 마산 간의 보급로를 타개하고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완전히 격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통영상륙작전(’50. 8. 17∼9. 22)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 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대대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인천상륙작전(’50. 9. 15∼9. 20)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괴군 최후의 발악적인 8월‚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한 작전으로서‚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 아래 1950. 9. 15‚ 유엔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 함대를 동원하여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를 선두로 세계 전사에 천연히 빛날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을 실시하면서‚ 9.15 06:30 미 해병대 제5연대 제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녹색해안에 상륙‚ 월미도를 탈취하였다. 동일 17:30부터 한·미 해병대가 400여 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4회에 걸친 파상공격을 실시‚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괴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 시가지와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 낙동강 전선의 총반격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울탈환작전(’50. 9. 20∼9. 28)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미 제10군단은 1950. 9. 18 서울로 진격하여 11일 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 지역과 시가지에서 북괴군 4개 사단(제9사단‚ 제18사단‚ 제25여단‚ 독립 제78연대)을 격퇴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선봉부대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 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9. 20 한강을 도하‚ 수색방향으로 진격한 뒤 최후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수도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여 잔적을 격멸하고‚ 9. 27 06:10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 동안 적의 점령 아래 있던 서울을 탈환하고 9. 29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북진.철수.재 반격작전(’50. 10. 20∼’5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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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1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 · 만 국경해산진까지 북진할 때‚ 해병대는 1950. 10. 7 인천을 출항‚ 묵호 및 원산에 상륙하여 고성 · 원산 · 함흥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1950. 10. 25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자 원산 · 함흥을 철수하여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1950. 12. 20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재편성하였다.
1951. 1. 4 수도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함락되자‚ 해병대는 재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영덕 · 안동 · 홍천 · 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도솔산 지구 전투(’51. 6. 2∼6. 20)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5월 춘계 공세를 격퇴한 직후‚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 요충지 도솔산(▲1‚148)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1단계 작전(1951. 6. 4 ∼ 6. 12)시 공격 목표 ∼1’에서 목표 ‘16’까지 점령한 뒤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고‚ 제2단계 작전(1951. 6. 13 ∼ 6. 24)시 공격 목표 ‘17’에서 목표 ‘24’까지 점령하고 버지선까지 진출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괴군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 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함으로써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전투이다.
1951. 6 .4 도솔산 탈환에 실패한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작전을 감행하는 등 난공불락의 진지를 혈전 17일 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하였다.
6. 20 드디어 빛나는 개가를 올림으로써 적 2개 사단을 격퇴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우군 전선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이 도솔산을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라 칭하면서‚ ‘무적 해병’ 휘호를 하사하였고‚ 1951. 8. 19 제1연대에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일성 고지(펀치볼) 지구 전투(’51. 8. 30∼9. 3)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 북쪽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전을 감행하였다. 제1단계 작전(’51. 8. 21~9. 1)시 현 을지전망대와 가전리 일대(▲924-▲1‚026-▲702-▲660)에 배치된 북괴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51. 9. 1~9. 20)시 간무봉 일대의 적 은거지를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육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김일성 고지(▲924) 및 모택동(▲1026)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4일 동안 924고지와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들을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 격찬하였다.
김포 지구 전투(’51. 3. 7∼’53. 7. 27)
1950. 9. 21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제3대대는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는 적 2개 대대를 격파하고 김포 · 강화도를 장악하였다. 1951. 1. 24 영덕 · 안동지구에 출동하여 북괴군의 남침 진로를 차단하던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1951. 2. 26 수도 서울 재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인천에 상륙‚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시를 방어(1951. 2. 26 ∼3. 6)하면서 서울 영등포 일대에 정찰대를 파견‚ 서울 재 수복 작전에 기여하였다.
1951. 3. 7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전개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김포반도를 완전 장악한 뒤‚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하면서 한강 너머 개풍군 및 개성 부근 일대에 정찰대를 전개하여‚ 월암리 전투 등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하고 한강을 사수하여 수도권 방어에 기여하였다.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52. 3. 17∼’53. 7. 27)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피아간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 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자‚ 수도 서울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으로 1952. 3. 17.부터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 지구로 투입된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 시 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 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제194‚제195사단)과 대결한 방어 전투이다.
해병대 제1전투단을 이 전투에서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과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여 군사 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과 신익희 민의원 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전략도서 확보작전(’51. 2. 14∼’53. 7. 27)
한국전쟁 동안 해병대는 부대의 특성을 활용하여 38도선 이북 동‚서해안의 전략 도서 확보 작전으로 적 해안을 봉쇄하고 적 후방을 위협하며‚ 첩보 수집 및 유엔군의 해군 활동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였다.
해병대는 동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2. 2. 독립 제42중대를 편성하여 1951. 2. 14 원산 앞 여도에 상륙하여 영흥만 일대의 신도 등 7개 도서를 점령하고 원산항을 봉쇄하였다. 1951. 8. 28. 독립 제43중대는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에 상륙하여 차기작전 대비 중‚ 적 상륙기습부대 1개 대대공격을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한편 서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4. 2 독립 제41중대를 편성하여‚ 서해안의 교동도(4월 2일)‚ 백령도(4월 23일)‚ 진남포에 인접한 석도(5월 7일)에 각각 상륙하여 해안선을 봉쇄하였다.
1952. 1. 15 해안선 봉쇄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제7대대를 서해도서인 석도 및 초도에 주둔케 하고‚ 제9대대를 백령도 및 연평도에 증강 배치하였고 제8대대를 동해도서인 여도 및 양도에 주둔케 하여 휴전 시 까지 약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전략도서 확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휴전 뒤 백령도를 비롯한 서북 6개 도서를 아군 통제 아래 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국가 안보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