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월남전 파병(’65. 10. 9)
1964. 8. 3 정부와 국회는 공산 침략에 직면한 자유월남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해병대는 1965. 9. 20 제2여단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전투부대로서 최초로 이 부대를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다.
1965. 10. 9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뚜이호아지구‚ 추라이지구‚ 호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면서‚ 6년 4개월 동안 짜빈동 작전 등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조국의 명예와 해병대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청룡부대 창설(’65. 9. 20)
공산군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자유 우방국으로서 공동 운명체의 사명감을 느껴‚ 동남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고‚ 한국전쟁 시 자유 우방 국가들은 은혜에 보답하며‚ 지구상의 모든 공산세력을 소탕하여 자유와 정의를 이룩하는 세계적인 사명과 의의를 가지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비는 해병대 1개 여단을 포함한 육군 1개 사단의 파월을 결정하였다. 1965. 6. 28 국방부 훈령 1호에 따라‚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해병대 전투명령 제1호가 하달됨에 따라‚ 1965. 9. 20 경북 포항기지에서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 제2여단을 창설하여 박정희 대통령 참석아래 전 국민이 축복하며 성원을 보내는 가운데‚ 파월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결단식을 가졌다.
파월 전투부대로서는 처음으로 동 부대는 동년 10. 3 수송함대 편으로 부산항을 출항‚ 10월 9일 월남 캄란만에 도착하였다.
캄란지역 작전(’65. 10. 9∼11. 14)
청룡부대는 1965. 10. 19 미 제1공수사단 제1여단으로부터 ‘캄란’만 일대의 전술 책임 지역을 인수하였다.
1965. 10. 21 제2대대는 워싱턴 작전을 전개하여‚ 판랑의 6Km지점인 부숑 비행장 전술기지의 확장공사에 따른 방어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965. 11. 4 백경(까투산) 작전을 실시하여 부숑 비행장을 위협하는 까투산의 적을 소탕함으로써‚ 18년 동안 베트콩의 아성으로 군림한 까투산을 탈환하였다.
그 뒤 제3대대는 번개 1ㆍ2ㆍ3호 작전에서 1번 도로를 위협하는 베트콩을 완전소탕‚ 나트랑 서북쪽 산악지역과 나트랑 비행장을 안전하게 확보하여‚ 적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뚜이호아(Tuy Hoa)지역 작전(’65. 12. 16∼’66. 8. 17)
나트랑 서북쪽에서 번개 작전을 수행하였던 청룡부대는 ‘뚜이호아’로 이동하여‚ 1966. 1. 1 청룡1호(여단급) 작전을 전개하여 공산군의 해상 보급 추진의 요람인 ‘봉로’만 일대에 준동하는 월맹 정규군 약 1‚500명을 완전 소탕하여‚ 월남의 대동맥인 1번 도로를 개척하고 월남 곡창지대의 하나인 뚜이호아 평야를 평정하였다.
그 뒤 약 1개월 동안 뚜이호아 서남부 평야에서 주민들과 피난민 추수 보호를 위한 청룡 2호 작전을 수행하였고‚ 1966. 2. 22부터 약 5개월 동안 양민 보호‚ 촌락 재건 등을 위한 재건 작전을 수행한 뒤 ‘봉로’만 부두시설과 1번 도로 개척 및 미군 공대의 교량 복구 보호를 위한 해풍작전에서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적이 던진 수류탄을 안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부하들을 위한 그의 초인적인 희생정신은 해병대장병뿐만 아니라 60만 국군의 귀감이 되었다.
해풍 작전(’66. 7. 22∼8. 17)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일명‘뚜이호아 고별작전’으로 적은 휴송평야와 연접된 고지일대에 분산 칩거하여 소규모 게릴라 전법으로 활동하였다.
청룡부대 제1대대와 제3대대는 1965. 7. 22일부터 27일간 지역일대를 수색 및 탐색하여 적을 소탕함으로써 뚜이호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 재건을 위한 기반을 구축함과 동시에 지역 내 1번 도로변의 잔적을 소탕하고 미 건설 공병대의 항만 및 교량건설과 비행장 건설공사를 완공토록 보호하였다.
특히‚ 귀순자의 첩보에 따라 1965. 8. 11 뚜이호아 서쪽 14Km 지점에서 실시한 기습 작전과 적극적인 탐색작전에서 베트콩의 동굴을 탐색하던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보여준 숭고한 희생정신은 전 국군의 귀감이 되었다.
추라이(Chu Lai)지역 작전(’66. 8. 18∼’67. 12. 21)
월맹군의 주요한 해상 침투로인 동시에 연합군의 최대 보급기지인 다낭 비행장과 월남군 1군 지역 배후에서 위협하는 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1966. 8. 16 북극성 작전을 전개‚ 추라이지구(쾅나이성)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황금‚ 비봉‚ 용안‚ 투망‚ 강구‚ 짜빈동‚ 뇌룡‚ 용머리‚ 테로이 매복‚ 용화 작전 등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여‚ 추라이지구 내 전술 책임지역을 확보하였다.
특히 짜빈동 작전에서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육박전‚ 역습 등을 실시하여 4시간 동안 사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적 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올려‚ 월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 최대의 전승 기록을 남겼다.
이 전투로 중대원 사병 전원이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고‚ 제11중대는 한 ·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하였다.
짜빈동 작전(’67. 2. 14∼2. 15)
짜빈동 작전(1967. 2. 14. 23:20 ~ 1967. 2. 15. 07:24)은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 2. 14. 23시 20분 손틴군 짜빈동에서 월맹정규군 제2사단 제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가 인해전술로 파상적 기습공격을 하였으나 제11중대 장병들은 전술기지에 구축한 외곽과 내곽방어선으로 연하는 교통호를 이용하여 일제 사격과 수류탄 및 크레모아 폭발로 침입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한때는 제3소대의 진지가 돌파되어 치열한 진내 육박전까지 전개하였지만‚ 지원화기의 적절한 운영‚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으로 4시간의 사투끝에 적의 주력을 격멸하고 전술기지를 방어하였다. 이 전투결과 한국 해병대는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룡부대 제11중대는 1967. 2. 15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제11중대 전원 191명(장교제외)은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군인의 최고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1968. 5. 28 제11중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하였다. [사진설명 :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하는 정경진 11중대장]
호이안(Hoi An)작전(’67. 12. 22∼’72. 1. 31)
청룡부대는 월남 제2의 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월남 정부의 통제구역을 확장하였고‚ 미 해병대 제3 상륙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7. 12. 22 비룡작전을 전개하면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호이안 지구의 최초작전은 1968. 1. 30 괴룡작전으로 월맹 정규군 제3사단의 대규모 구정공세에 따른 반격작전을 약 1개월 이상 실시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호이안시 평정 및 다낭지역 적 위협을 제거하였다.
그 후 전술책임지역 내 적 섬멸을 위한 용진작전‚ 추수보호 작전을 전개하였고‚ 서룡작전‚ 포병대대 기지 방어 작전‚ 승룡‚ 황룡작전 등을 전개하여 지역 내 적을 98% 소탕하고 호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특히‚ 승룡 12-1호(고노이 섬)작전 및 승룡 15-1호(베리아반도 상륙)작전은 월남 전투사에 길이 빛날 해병대 작전이었다.
고노이 섬(승룡 12-1)작전(’69. 6. 3∼6. 19)
청룡부대는 1969년 6월 3일부터 6월 19일 까지 다낭 남방20Km 지점에 있는 월맹군 제36연대의 난공불락의 요새지인 고노이 섬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미국‚ 월남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수륙양면과 공수투입 등 입체적인 기습공격작전을 감행하여‚ 지역 내 적을 완전 소탕하고 중장비(도저30대)를 이용‚ 지하통로 및 정글 등‚ 적의 전략적 은거지를 완전히 제거한 작전이다.
이 작전으로 ‘디엔반’군과 ‘호이안’시는 외곽으로부터 적의 위협을 받지 않고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베리아(승룡 12-1)상륙 작전(’69. 9. 5∼9. 30)
청룡부대는 1969년 9월 5일부터 9월 30일까지 인천상륙작전 이래 처음으로 월남전 사상 최초로 한 · 미 해병대가 연합으로 미 7함대의 지원 하에 감행된 여단급 상륙작전(한국 해병대 RLT‚ 미 해병대 BLT)을 실시하여 다낭 30Km 지점에 있는 천연적 요새지인 베리아 반도의 적을 완전 소탕하고 초토화함으로 적의 지역사용을 거부하였으며‚ 억류된 1‚900여 명의 양민을 구출한 작전이다.
베리아반도는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이 천연 요새를 이용하여 다낭 일대 군사시설을 위협하던 요새지이다.
개선 및 결과
1968. 5. 3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열린 파리평화협정 결과에 따라 철군 계획이 발표되자‚ 1971년 4월부터 미국의 닉슨 독트린의 ‘월남전화 계획’에 따라 철군계획을 발표하여 제1차 1971. 12. 4 청룡부대를 제 2진으로 철수가 단계적으로 단행되면서‚ 1972. 2. 29까지 제5진의 마지막 철수가 이루어져 제2여단(청룡부대)이 개선 귀국하게 되었다.
건군사상 처음으로 해외 원정군으로 장도에 올랐던 제2여단(청룡부대)은 캄란만에 상륙한 이래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를 비롯하여 소부대 작전 15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및 대민 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 지원‚ 1‚593동의 건설 지원‚ 450‚064명의 친선 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월남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