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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兵隊 歷史

 제 1 장 해병대 창설

 

1. 배경 및 동기

가. 국가이익과 군사전략 수행상 상륙전 전담부대의 필요성

나.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입지적 조건

다. 여·순 반란사건 후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 절박

라. 한반도 대·소 도서 확보를 위한 상륙전 부대 필요

마. 해군 육상기지의 경비부대 필요

 

2. 창설(1949. 4. 15)

가. 장소 : 진해 덕산 비행장

나. 병력 : 380명

다. 기구

 

사령관

                                       중  령  : 신 현 준

중  령  : 김 성 은

참모장

 

본부

 

경리대

 

근무중대

 

방첩대

 

소총중대

   (15명)                (16명)             (70명)            (10명)               (270명)

※ 창설 근거 : 대통령령 제88호 (1949. 5. 5 해병대령 공포)

3. 창설경위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 내에 공산 좌익 침투 세력이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로당 프락치들이 주도한 반란·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 지역에서 군·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대한민국의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임시함대)는 해상봉쇄 임무를 띠고 신현준 중령이 지휘하는 함정을 여수 앞바다에 출전시켰으나,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판단 즉 "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가정적인 판단과 그러한 판단에 따라 제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되고, 또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그 창군기의 해군 수뇌부에서는 결코 용이할 리 만무한 시대 여건을 무릅쓰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끈덕지게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그 어려운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해군 수뇌자들이 해병대 창설 계획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당시 국방부장관 이범석씨도 이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마침내 승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 2월 1일 당시 해군통제부 참모장 신현준 중령이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되고, 통제부 교육부장이던 김성은 중령이 해병대 참모장에 각각 임명되어 창설 준비에 분망한 결과, 드디어 동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병력 380명(해군으로부터 편입한 장교 및 하사관 80명과 해군 신병 제13기 중에서 선발한 해병대 병 제1기 300명)으로 해병대 창설식을 거행하였으나, 이 날은 한국 해병대의 발전을 기약한 역사적인 날로 영구히 기념될 해병대 창설일인 것이다.

창설 당시 해병대는 다 떨어진 격납고 천장 위로 밤 하늘의 별을 헤고, 보잘 것 없는 시설과 악조건에서도 해병대 가족은 한 덩어리가 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에 불탔다.이것이 장차 6·25 전쟁 시 전략적 가치의 비중이 큰 상륙부대로서 중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니, 이 때 벌써 해병대의 정신적 기초 내지는 해병대 정신인 '가족적 단결정신' '애민정신' '인내의 정신' '임전무퇴의 정신'이 뚜렷한 구현을 보아 해병대 전통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해병대는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에 의하여 해병대령이 공포되어 법적으로 승인을 얻게 되었다.

4. 창설기 전투상황

가. 진주지구 공비토벌작전('49.8.29 - 12.26)

(1) 개 요

1949년 8월 29일 진주에 출동한 해병대는 여·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을 근거로 하여 출현하는 공비를 토벌하면서 진주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던 중, 10월 27일 300여명의 공비로부터 야간기습을 받았으나 적으로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불리한 여건에서도 선전 분투하여 이들을 격멸함으로써 처음으로 국민에게 알려졌다.

(2) 주둔 부대 : 1개 대대(부대장 중령 김성은)

(3) 주요 활동 : 공비 토벌 및 경계, 민심 수습, 선무 공작, 자체 훈련

(4) 진주 주둔부대 편성표

                                                                                  1949. 8. 29                             

                                                                               (병력 : 550명)

진주부대

                                              중   령  : 김 성 은

본부중대

 

제1중대

 

제5중대

 

제7중대

 

하사관교육대

     (65명)             (120명)            (118명)            (200명)  

  대위 고 길 훈      대위 김 재 수      중위 안 창 관      중위 김 용 국

(5) 진주 주둔

여·순 반란사건 이래 잔여 공비들이 지리산에 몰려들어 이 곳을 근거로 하여 진주를 위시한 주변 일대의 도시와 촌락에 출몰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1949년 8월 26이러에 대구에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준장과의 협의에 의하여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소탕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29일에 진주로 이동하여 진주시, 창녕군, 함안군 일대를 경비 담당지구로 하여 공비 소탕에 임하였다.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면서 공비 토벌을 하는 한편, 자체의 정신훈련과 아울러 전투훈련, 민심을 수습하는 선무공작에도 무척 애를 썼다.

진주 주둔기의 해병대 표어는 "백성 없이는 전투도 없다"는 것으로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방도를 강구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비 내습을 완전히 분쇄한 해병대의 분투를 찬양하는 서한이 주한 미군 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으로부터 신 사령관에게 보내졌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해병대를 위문하였다.이와같이 해병대가 진주에서 만 4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민심 수습, 선무공작, 공비 소탕에 많은 성과를 거둔 후, 12월 26일 진주 시민과 석별하고 진주를 출발,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 제주 공비토벌 작전('49.12.28 - '51.3.31)

(1) 주둔경위

1948년 초 제주도 내 공비 병력은 약 1,500명으로 남로당 제주도지구 군사부 총책 김달삼 일당이 주동이 되어 4·3 폭동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의 정국은 유엔 안보회의 결의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결정으로 남한 단독선거가 5월 10일에 실시하기로 확정되자,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계열은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는 실력 투쟁을 벌여, 남한의 제주도만이라도 무력으로 교란하여 5·10 선거를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었으니, 제주도 주군 육군 제9연대에 군내 세포책이 잠입하여 남로당인 김달삼과 호응하여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 전역에 방화와 파괴를 일삼고, 우익인사를 학살하며, 양민으로 하여금 5·10선거를 기피하는 방향으로 공포심과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결국 육군(11연대, 9연대, 2연대)과 경찰의 격멸 작전(1948.5.15 - 1949.2.28)으로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잔여 공비는 약 100여명이 한라산을 근거지로 세력 부식에 급급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는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육군 독립 제1대대와 교대하고 사령부와 2개 대대로 증편하는 한편, 한라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 작전에 임하였다.

해병대의 제주도 주둔은 육군 부대의 제주도 경비 임무 수행상 군용물자의 보급과 수송 문제로 많은 불편을 겪어 왔으므로, 육군 측은 해군 측과 협의를 통하여 해병대가 제주지역 경비 임무를 맡게 되었다.

(2) 해병대 작전

(가) 해병대 임무

1)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 육체적 훈련

2) 4·3사건 이래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의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그들을 생활 안정의 길로 인도하는 것

3) 한라산을 근거지로 한 공비를 토벌하는 것

(나) 해병대 편성표 (*** 표가 깨져 있어 생략함!!!)

(다) 부대배치

○ 제주읍 부대 : 사령부 본부, 제주읍 부대

○ 모슬포 부대 :

      제1대대(북제주군), 제2대대(남제주군)

(라) 작전경과

1) 민심수습 작전

○ 공비토벌작전에 앞서 도민의 민심수습 작전으로 주민 계몽운동을 실시, 엄정한 군기 확립 노력

○ 도내에 산재한 무의촌에 해병대 의무대 파견, 순회 진료 실시

○ 시설 복구 공사 : 도로, 하수도 보수

○ 농번기 대민 지원 실시

○ 주민 계몽 강연 실시

* 제주도민 신뢰회복, 4·3사태 이후 품고 있던 군에 대한 원한과 공포심 해소

2) 공비 소탕 작전

가) 제1기 작전('50년 2월 - 6월)

○ 제1대대(923부대)는 정보참모 고길훈 소령의 지휘 하에 정보대로서 그 예하 부분대로 구성된 유격대를 편성, 한라산 서쪽 지역 오백장군과 1394고지 부근에서 토벌작전 전개

○ 전과

-  제1대대 : 사살16명, 포로8명, 기타문서 노획

-  제2대대 : 사살3명, 장비 노획

-  제3소대 : 사살5명

나) 제2기 작전('51년 1월 - 3월)

○ 해병대사령부는 1950년 12월 15일 함흥에서 진해로 철수하여 부대 정비 기간 중 국방부에서 제주도 공비에 의한 피해가 증가하므로, 6·25 직전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담당했던 해병대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해병대사령부는 1951년 1월 14일 1개 중대 규모(제주 해병대 부대장: 권석기 중위)의 해병대 부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 제주 해병대 부대는 제주 경찰 공비 토벌 1개 소대를 지원받아 4개 소대로 혼합 편성, 제주도 군·경·민 합동 전투지휘소를 설치한 후 공비토벌 작전을 1951년 1월 17일 실시하였다.

지휘소는 한라산 서쪽 서귀포 부근에 위치하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1소대는 서쪽, 제2소대는 동쪽, 제3소대는 남쪽에 각각 배치하고 소대 단위의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 전과

- 제1소대  : 사살 3명, 장비노획

- 제2소대  : 사살 38명

- 제3소대  : 사살 5명

(3) 제주도 공비 토벌 일정

1948. 4. 3 :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남로당 좌익세력 분자들이 주요 관공서 일부 장악, 제주도는 법과 질서가 혼란한 사태 발생

1948. 4. 4 : 제주 경찰과 제주지구 경비대 육군 제9연대가 폭동 진압 전개, 성과 미흡

1948. 5. 15 : 육군 제11연대(본부와 1개 대대)는 폭동진압부대로서 제주도 이동

1948. 7. 10 : 대구 주둔 육군 제6연대(1개대대) 제주도 증원 후 제9연대 재편성 공비토벌작전 전개

                   * 작전기간 : 1948. 7. 23 - 12. 29

1948. 7. 24 : 육군 제11연대 수원으로 복귀

1948. 12. 29 : 제9연대는 대전주둔 제2연대와 임무교대하고 대전으로 이동 육군 제2연대 공비토벌작전 수행하였으나 공비 준동 장기화 조짐

                   * 작전기간 : 1948. 12. 29 - 49. 2. 28

1949. 3. 2 : 육군 제2연대 주축으로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 설치후 국군중 최초로 육·해·공군과 경찰로 증강된 합동 작전 전개하므로 새로운 작전형태와                 공비토벌 작전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둠.

                 * 작전기간 : 1949. 3. 2 - 49. 5. 1

1949. 5. 15 :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 해체

1949. 8. 13 : 육군 제2연대는 독립 제1대대에 임무를 인계, 인천 철수

1949. 12. 28 : 육군 독립 제1대대는 해병대사령부에 임무를 인계

                    해병대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비토벌, 민심수습, 치안확보에 매진 도내 안정을 유지시켰음.

                   * 작전기간 : 1949. 12. 28 - 50. 7. 2

1950. 1. 1 : 제주읍부대와 모슬포부대 개편

1950. 6. 25 : 해병대가 제주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임한지  6개월만에 북괴의 전면 남침을 맞아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제주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도내 치안과 해안 경비임무 수행

1950. 7. 13 : 모슬포부대의 제1대대를 기간으로 고길훈 부대 신편

1950. 7월 중순 : 제주도에서 신병 3,000명을 모집하여 보병대대로 증편 훈련시킴

1950. 9. 1 : 사령부와 3개 보병대대 제주도 출항, 진해를 경유하여 9. 6일 부산에 도착

1950. 9. 12 : 해병대 인천상륙작전 참가위해 부산 출항 9.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참가

1950. 9. 14 : 제주도에 제2차 공비토벌작전으로 공비 무력 격멸 재기불능 상태 도달, 50여 명의 공비 사살

                   해병대 1개 중대(권석기 중위)는 군·경·민 합동 전투지휘소를 설치

                   * 작전기간 : 1951. 1. 14 - 3. 31

                   해병대사령부는 '50. 12. 15 함흥, 원산 지구 전투를 마치고 진해로 철수, 부대 정비 중, 국방부에서 제주도 한라산을 거점으로 공비 준동이 심해지므로 6. 25 직전 제주도 공비 토벌 작전을 담당했던 해병대 부대를 파견 결정하였음.

1951. 1. 22 : 한국전쟁을 돌발이후 육군 제1훈련소가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

1951. 9. 25 : 해군 제주경비부 설치

1953. 2. 3 : 육군 무지개부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실시

                 * 작전기간 : 1953. 2. 3 - 5. 1

                 육군 무지개부대는 대유격전 특수훈련을 받은 부대로서 공작대와 기습대의 2개 주요부대로 편성되어 공비토벌작전을 약 3개월 간 실시하였다.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은 5년 2개월 간  실시하였음

1965. 10. 15 : 제주 통합사령부 개편

1967. 12. 25 : 제주군 지역사령부로 개칭

1974. 1. 28 : 해군 제6해역사령부로 증·개편

1986. 2. 1 : 제주방어사령부로 개칭

 

* 참고사항 : 일제시대 제주도 일본 주둔군은 제5군으로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나가쓰루 사비시게' 중장이 지휘하는 3개 사단과 하나의 혼성사단으로 구성된 병력 6만 여명의 대군이 주둔함. 제5군의 작전 방침은 한라산을 복곽진지로 하여 장기간 주둔함으로써 제주, 모슬포, 서귀포 등 비행장의 사용을 저지 방해하는 데 주둔 목적이 있었음.

 

제2장 한국전쟁기

1.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50. 7. 17 - 7. 21)

가. 개요

적의 주력은 서울, 인천 등지를 경유하여 7월 6일에는 금강을 향하여 쇄도하여 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훈련과 공비토벌에 여념이 없던 해병대는 처음으로 출동하여 본격적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7월 15일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약 1개 대대가 해본 작명 갑 제58호로 제주도를 출항하여 전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전투야말로 해병대가 얼마나 한 공훈을 세울 것인가 하는 시금석이 되는 전투였다.

출동하는 용사에게 신현준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간곡한 훈시를 하였다.

○ 대한민국의 새역사를 창건하는 우리 해병대는 민심을 수습하여야 한다.

○ 선발대인 여러 장병들은 해병대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 백전백승의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

* 고길훈 부대 편성표

                                                                                 1949. 7. 13

고길훈부대

                                                                       소   령    고   길  훈

본부

 

제1중대

 

제2중대

 

제3중대

 

수색소대대

              중위 한혜택       중위 김광식         중위 이봉출       중위 김종식

  (151 화기중대)        (152 중대)        (153중대)

 해병대 작명 제1호                                               1950. 07. 14 15:00

                                                                      제주도 제주읍

                                                                      해병대 사령부

1. 생략

2. 부대는 일부 병력을 군산방면으로 이동하려 함.

    가. 출발시간 별도로 지시함

3. 출동부대는 07. 15. 01 : 00

    승선순위 : 151중대, 152중대, 본부중대, 153중대, 사용선박 FS정1척

4. 인사참모는 07. 15. 06:00까지 출동부대를 명부를 작성보고하라.

    군수참모는 07. 14. 19:30 까지 병기, 탄약, 피복, 식량

    기타 소요물자를 공급 완료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

5. 출동중 부대 지휘는 소령 고길훈이 이에 응하라.

   사령부 위치는 변동 없음. 통신사항은 무선통신을 함.

해병 대사령관

해병대  대 령 신현준

 

(나) 작전경과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준동하는 공비토벌과 민심 수습 작전을 수행함과 아울러 진정한 호국충정의 길을 가기 위해 불철주야 맹훈련을 하던 중 6·25 동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을 함락한 후 대전을 거쳐 호남방향으로 물밀 듯이 남하하는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로 추정되는 적의 예봉을 저지, 금강산을 방어키 위해 한국 해병대는 1개 대대 규모의 고길훈 부대를 처녀출전시켜 7월 16일 군산에 상륙, 금강을 도하하여 장항 북방 7KM 지점에서 남하하는 적에 대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 7여 시간을 교전하였으나, 장비의 열세로 군산으로 철수하였으나 적에게 타격을 안겨 주었으며, 그 이후 고길훈 부대는 7월 20일까지 금강을 방패삼아 군산시를 방어, 해군 군산 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LST-810 함에 정부미 1만 3천가마와 중요한 정부물자를 탑재 반출한 후 명에 의거 해상으로 철수, 7월 21일 목포에 도착하였으며, 이리 방면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제3중대는 육군, 경찰과 더불어 밀려드는 적에 대한 결사적인 항전으로 적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지연하였다.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7월 21일 18:00 새로운 작전을 위하여 출발하여 7월 22일 08:00 에 여수항에 입항한 후 M1 소총 및 박격포 등 신장비를 지급 받고 신장비 조작법 교육에 매진하였다.

(다) 전투결과

이 최초 전투를 계기로 필승의 신념과 자신감을 얻은 해병대는 적사살 62명, 사상 311명, 포로 5명의 대전과를 획득하였으며, 전사36명, 부상 31명, 행방불명 8명의 손실을 입었다.

3. 해병대 주요 전투 요약

가. 6·25 전쟁

 전투명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투

 통영상륙작전

함양, 진주지구 전투

진동리 지구 전투

 부   대

고길훈 부대

 김성은 부대

 김성은 부대 

 김성은 부대 

 기   간

 '50. 7. 15 - 7. 20

'50. 8. 17 - 9. 12

'50. 7. 23 - 7. 31

 '50. 8. 1 - 8. 12

 규   모

대대

대대

 대대

 대대

 지휘관

소령 고길훈

 중령 김성은

 중령 김성은 

 중령 김성은 

 작   전

 형  태

 공격, 지연전

 공격작전

(상륙전)

 공격, 지연전 

  공격작전

 작   전

 기여도

 북괴군과 벌인 첫전투

전략적 군 요충지

북괴군 1개 대대 격퇴

적 공격 기세 약화

낙동강 방어선 확보 기여

유엔군의 첫 반격전

 상   훈

 -

국방부장관 표창

-

 전장병 일계급 특진

건군 최초의 큰 전과

 전   과

 적사살 62

포로 5

적사살 469

적사살 102

포로 3

노획품 78

적사살 171

포로       8

노획품    78

 피   해

전사 39

부상 31

전사 15

전사 5

부상 16

전사 23

부상 76

 비   고

-

 적대대 격멸,

"귀신잡는 해병대" 전통수립

-

적대대 격멸,

국군(해병대) 필승의

자신감 부여

 

 전투명

경인지구작전

(인천상륙, 서울탈환 작전)

목포지구 공비소탕전

원산, 함흥 지구 전투

도솔산 지구 전투

 부   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2대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기   간

 '50. 9. 15 - 10. 7

'50. 10. 19 - 11. 23

'50. 10. 27 - 12. 15

 '51. 6. 4 - 6. 19

 규   모

연대(증강)

대대

 연대

 연대

 지휘관

대령 신현준

 소령 김종기

 준장 신현준

 대령 김대식

 작   전

 형  태

상륙, 공격작전

(대규모 연합 작전)

대비정규전

 공격작전

  공격작전

(산악전)

 작   전

 기여도

· 인천 시가지 전투

· 수도서울 조기탈환

적 패잔병 소탕

함흥, 원산철 수 작전기여

북진작전 임무 기여

중동부전선 전략적 요충지 도솔산 확보,

우군전선 활로 개척

 상   훈

국방부장관,

한·미 대통령 부대표창

-

-

대통령 부대표창

국회 감사문 전달

 전   과

 적사살 2392

포로      805

노획품  2523

적사살 102

포로       3

노획품   78

적사살  808

포로        20

노획품   149

사상      465

적사살 171

포로       8

노획품    78

 피   해

 전사   97

부상 300

행불   16

부상  1

전사  22

부상  97

행불    1

 전사 181

부상 647

실종   12

 

 전투명

안동, 영주 지구 전투

 영덕 지구 전투

영월 지구 전투

홍천 지구 전투

 부   대

독립 제5대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기   간

 '51. 1. 24 - 2. 12

'51. 1. 25 - 2. 13

'51. 2. 19 - 3. 15

 '51. 3. 18 - 4. 3

 규   모

대대

연대

연대

연대

 지휘관

소령 오명복

 대령 김성은

 대령 김성은 

 대령 김성은 

 작   전

 형  태

대비정규전

대비정규전

 공격작전 

  공격작전

 작   전

 기여도

적패잔병 소탕,

대구-안동-영주간

보급로 개통

적패잔병 소탕

춘양-영월 보급로 개통,

전략적 요충지 마전리 확보

Repper 작전을 위한

전술요지인 가리산 점령확보

 상   훈

 -

-

-

-

 전   과

 적사살 38

 포로    11

사상     52

적사살 82

포로    32

사상      7

적사살  145

포로       16

사상     177

노획품    26

적사살  121

포로       39

사상       40

노획품   50

귀순        8  

 피   해

-

전사  5

부상  9

행불 22

전사  24

부상  30

 전사 33

부상 91

행불  2

 비   고

-

-

-

유엔군과 국군의

대규모 공세로  

효과적 철수성공

 

 

 

 전투명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

종합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부   대

해병대 제1연대,

제1전투단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전투단

해병대 제1전투단

 기   간

 '52. 3. 18 -'53. 7. 27

'52. 4. 1 - '52. 8. 30

'52. 9. 5 - '52. 9. 30

 '52. 10. 2 - '52. 10. 30

'52. 10. 31 - ' 52. 11. 30

 규   모

연대 전투단

연대(증강)

연대(증강)

전투단

전투단

 지휘관

대령 김동하

준장 김석범

대령 김성은

 대령 김동하

 대령 김석범

 준장 김석범

대령 김성은

 작   전

 형  태

대비정규전

대비정규전

 공격작전 

  공격작전

 

 작   전

 기여도

· 수도서울 방어

· 군사분계선을

  아군이 유리하게 확정

중공군 대대/중대 격퇴,

전진지 야간기습 공격

3회 실시

증강된 적중대 격퇴

('52.9.6-9.7),

적대대격퇴

('52.9.19-9.20)

중공군 추계1차 공세시

대규모 병력 격멸,

전지 진지선 재조정

중공군 추계2차 공세시

대대 및 연대 격퇴

 상   훈

 대통령 부대표창,

국회 감사문 전달

-

-

-

대통령 부대표창

 전   과

적사살 12290, 추정 사살 1721, 포로 42, 사상 11011, 노획품 1000  

 피   해

전사  523, 부상 1938, 실종 269

 전투명

화천 지구 전투

 대우산 전투

김일성(924) 고지,

모택동(1062) 고지 전투

 부   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해병대 제1연대

 기   간

 '51. 4. 24 - 5. 22

'51. 7. 8 - 7. 10

'51. 8. 30 - 9. 3

 규   모

연대

연대

연대

 지휘관

대령 김성은

 대령 김대식

중령 김동하

 작   전

 형  태

공격작전,

지상전

공격작전,

산악전

공격작전,

산악전 

 작   전

 기여도

화천 저수지 수문

완전히 탈환

-

펀치볼 확보,

적의 본거지인 내금강 확보

 상   훈

 -

-

국방부장관 부대 표창

대통령 격려문 전달

 전   과

 적사살 385

 포로    137

사상     40

적사살 90

포로     3

사상     1

노획품  50

귀순      8

전사 701

포로   244

노획품 395

 피   해

전사 21

부상 42

행불  2

전사   38

부상  193

행불   11

전사  183

부상  717

행불     8

 비   고

중공군 대규모 공세로

효과적 철수성공

-

적 1개 연대 격멸

 

 전투명

연천 지구 전투

김포 지구 전투

 부   대

해병대 제1전투단

해병대 독립 제5연대

 기   간

 1953. 6. 27 - 1953. 7. 7

1951. 2. 6 - 1053. 7. 27

 규   모

전투단

대대

 지휘관

대령 김성은

소령 오명복

 작   전

 형  태

공격작전 (지상전)

방어작전 (지역방어)

 작   전

 기여도

고지 확보 탈환

유엔군과 국군의 총공세에 기여

수도 서울 방어에 한 몫을 담당

 상   훈

대통령 부대 표창

-

 전   과

적사살    171

추정사살 118

사상       372

노획품      35

적사살  774

포로      73

사상    164

노획품    35

 피   해

전사 25, 부상 38, 실종 3

전사 49, 부상 134, 행불 12

 비   고

-

공세적 방어 임무 수행

 

 나. 월남전

 전투명

전략도서 확보작전

양도작전

여도상륙작전

교동도상륙작전

연평도상륙작전

백령도상륙작전

석도,초도 상륙작전

 부   대

독립 43 중대

독립 42 중대

독립 41 중대

독립 41 중대

독립 41 중대

독립 41 중대

 기   간

'51.8.28-'52.2.25

'51.2.14

'51.4.2

'52.1.18

'51.4.23

'51.5.7

'52.1.22

 규   모

중대

6개 도서소대

중대

중대

중대, 대대

소대, 분대, 조단위

 지휘관

중위 최청송

대위 심희택

중위 이동호

대위 민용식

대령 김두찬

대위 이동성

 작   전

 형  태

도서작전

(전진기지 확보)

도서상륙

(도서방어)

도서상륙

도서상륙

도서상륙

도서상륙

(기습상륙)

 작   전

 기여도

·적후방 위협

·첩보공작활동

·해상봉쇄선 연장

동해안 요충지

원산만 봉쇄

연백 일대

적의 인천방향 진출 차단

·해주항 봉쇄

· 인천항

 해상위협 방지

도서 경비와

민심수습

서해안 일대

적후방 보급로 차단/위협

 상   훈

미대통령

은성,동성훈장

미태평양 함대사령관 찬사

-

-

-

-

-

 전   과

적사살  156

포로      14

선박     15

개인/공용화기 93

적사살 181

포로     25

사상    3

선박     5

개인/공용화기 23

-

-

-

적사살 205

포로      2

사상     21

개인/공용화기 24

 피   해

전사 9

부상 12

실종 2

전사 14

부상 24

-

-

-

전사  8

부상 22

 전투명

짜빈동 작전

청룡 1호 작전

해풍작전

 부   대

청룡 2여단 3대대 11중대

청룡 2여단

청룡 2여단

 기   간

 '67. 2. 14 - 2. 15

'65. 12. 16 - '66. 1. 16

'66. 7. 22 - 8. 7

 규   모

중대

여단급

대대급

 지휘관

대위 정경진

준장 이봉출

대위 이인호

 작   전

 형  태

중대 전술기지 방어

여단급 탐색작전

탐색작전, 공수기동 기습작전

 작   전

 기여도

·월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 최대 전과 획득

 -월맹군 2개 연대 격퇴

·중대 전술기지 방어 중요성 인식

·한국군 최초의 여단급 섬멸작전으로

  한국군 전투력을 국내외에 과시

·월남 3대 곡창지대 투이호아 평야 장악

·귀순자 첩보에 따라,

 9중대 1개 소대의 지원을 받고, 동굴 탐색 중 전사한 고 이인호 소령의숭고한 희생정신은 전국군의 귀감

 상   훈

한·미 대통령 부대표창

전중대원 1계급 특진

* 중·소대장, 태극무공훈장 수상

-

    · 이인호 대위 : 1계급 특진

       - 태극무공훈장

 전   과

 적사살 243

 포로        2

총기류  47

적사살  473

포로     18

귀순      3

용의자체포 590

개인화기 28

수류탄 500

잔적 검거 87명

 피   해

전사 15, 부상 33

-

이인호 대위 전사

 비   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 전통수립

뉴욕타임즈 →

"우방군 지상작전 최대의 승리"

-

 

 전투명

테로이 매복작전

승룡 12-1호

(고노이섬) 작전

승룡 15-1호

(배리어 반도) 작전

 부   대

청룡 1대대 2중대 3소대 1분대

청룡 2여단

청룡 2여단

 기   간

 '67. 9. 17

'69. 9. 5 - '69. 9. 30

'69. 9. 5 - 9. 30

 규   모

분대

여단급

· 한국 : 1개 연대

· 미국 : 1개 대대

 지휘관

하사 김학영

준장 이동호

대령 고광수

 작   전

 형  태

매복작전

수륙양면, 공수투입 기습공격 작전

한·미 연합 상륙작전

 작   전

 기여도

·월남전 사상

 소수 매복대가 아군 피해없이 최대 전과 획득

·분대장의 영웅적 전투 지휘

·각종 지상 및 지하시설로 된 수상 보급 중간 기지

* 디엔반도, 호이안 시 적 위협제거

·월맹군, 지방게릴라 천연요새지 장악

- 다낭일대 군사시설 적 위협제거

* 인천상륙작전 이래 최초의

    한,미 여단급 상륙작전 실시

 상   훈

· 전분대원 1계급 특진

· 분대장, 을지·미은성무공훈장 수상

-

   -

 전   과

 적사살 32

 포로      4

총기류  21

수류탄 10

적사살 261

포로        8

용의자검거 11

개인화기  123

공용화기     6

적사살  255

포로       4

용의자검거 40

개인화기 149

공용화기   3

 피   해

-

-

-

[자료정리 : 해병닷컴]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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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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