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조경식 해병소령은 1955년 전북대학교를 졸업한 후 해병대 간부후보생 21기로 입대하여 같은 해 8월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전후방 지역에서 작전장교와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1966년 11월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3대대 작전보좌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조경식 당시 대위가 소속된 3대대는 증강된 적을 격멸하기 위한 ‘투망작전’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작전은 헬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작전 6일째가 되어도 기상 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아군은 작전을 연기하고 대대본부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때 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짜빈박마을 동북쪽 197고지에는 한국군 보급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월맹 정규군 200여명이 잠입하고 있었고, 복귀를 위해 아군 3대대가 나타나자 적군은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군 첨병 소대가 유린되고 대대 지휘부 선두까지 위험에 처하자, 조경식 대위는 흉부와 복부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혼신을 다해 부대를 지휘하며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하자 조 대위는 아군의 전술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작전계획과 상황판 지도 등 비밀서류를 잘게 찢어 버리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전쟁기념관>
조경식 당시 대위가 소속된 3대대는 증강된 적을 격멸하기 위한 ‘투망작전’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작전은 헬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작전 6일째가 되어도 기상 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아군은 작전을 연기하고 대대본부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때 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짜빈박마을 동북쪽 197고지에는 한국군 보급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월맹 정규군 200여명이 잠입하고 있었고, 복귀를 위해 아군 3대대가 나타나자 적군은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군 첨병 소대가 유린되고 대대 지휘부 선두까지 위험에 처하자, 조경식 대위는 흉부와 복부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혼신을 다해 부대를 지휘하며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하자 조 대위는 아군의 전술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작전계획과 상황판 지도 등 비밀서류를 잘게 찢어 버리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전쟁기념관>
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호국 영웅 / [서울경제] 2010년 12월 31일(금) 오후 06:01
전쟁기념관은 베트남전쟁 짜빈박전투의 영웅 조경식(사진) 해병대 소령을 2011년 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지난 193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조 소령은 1955년 전북대를 졸업한 후 해병대 간부후보생 21기로 입대해 같은 해 8월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전후방 지역에서 작전장교와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1966년 11월 제2해병여단(청룡부대) 3대대 작전보좌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조경식 당시 대위가 소속된 3대대는 증강된 적을 격멸하기 위한 '투망작전'에 투입됐다.
대부분의 작전은 헬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작전 6일째가 돼도 기상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아군은 작전을 연기하고 대대본부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때 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짜빈박마을 동북쪽 197고지에는 한국군 보급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월맹 정규군 200여명이 잠입하고 있었고 복귀를 위해 아군 3대대가 나타나자 적군은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군 첨병 소대가 유린되고 대대 지휘부 선두까지 위험에 처하자 조 대위는 흉부와 복부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혼신을 다해 부대를 지휘하며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위기상황에 처하자 조 대위는 아군의 전술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작전계획과 상황판 지도 등 비밀서류를 잘게 찢어버리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김광수기자 bright@sed.co.kr
대부분의 작전은 헬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작전 6일째가 돼도 기상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아군은 작전을 연기하고 대대본부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때 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짜빈박마을 동북쪽 197고지에는 한국군 보급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월맹 정규군 200여명이 잠입하고 있었고 복귀를 위해 아군 3대대가 나타나자 적군은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군 첨병 소대가 유린되고 대대 지휘부 선두까지 위험에 처하자 조 대위는 흉부와 복부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혼신을 다해 부대를 지휘하며 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위기상황에 처하자 조 대위는 아군의 전술이 노출될 것을 염려해 작전계획과 상황판 지도 등 비밀서류를 잘게 찢어버리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김광수기자 bright@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