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에서 철수 대기 중인 국군 1군단 장병들
1950년 11월 21일, 미 10군단(알몬드 소장) 예하 미 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했고,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까지 전진해 압록강을 목표로 진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2일부터 미 해병 1사단이 철수를 시작했고, 동부전선의 한국군 및 유엔군도 함흥과 원산 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신현준 준장)는 미 10군단에 배속돼 주력으로서 원산을 방어하고 급변하는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2월 2일 사령부, 2·5대대와 함흥으로 이동했고 1·3대대는 원산을 방어했다.
원산을 위협하던 적은 12월 7일 덕원의 모든 고지를 점령하고 원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또 마식령을 넘은 중공군도 이미 원산 동쪽에 진출했으며, 더구나 원산 시내에서는 적 패잔병으로 구성된 듯한 게릴라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3대대는 원산 북방 방어선에서 원산부두로 철수하라는 미 3사단의 명령에 따라 10중대-대대본부-11중대-화기중대 순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시내로 침입하는 적을 저지하면서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9중대는 4시간에 걸친 혼전 끝에 박격포로 무장된 1000명 규모의 적을 격퇴함으로써 3대대는 무사히 원산을 떠나 부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1대대는 갈마(葛麻)반도의 비행장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고, 원산 남쪽 방어지역에서 철수해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방어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원산 일대의 최후 방어 부대가 됐고, 결국 12월 9일 최종적으로 원산만을 떠나게 됐다.
한편 함흥지역에서는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로부터 격전을 거듭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함흥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고, 미 10군단의 함흥방어 계획에 따라 예하 1연대는 지경에, 5·7연대는 연포(連浦)비행장 부근에 각각 배치했다. 이로써 함흥·흥남지역에 집결한 한국군 및 유엔군 부대들은 함흥지역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해상 이동에 착수하게 됨으로써 흥남철수작전도 그 종국에 접어들게 됐다.
함흥을 공격하고 있던 중공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할지라도 장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는 이러한 적의 약점을 이용해 야간에 가급적 적에게 근접하고 다음 집중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많은 성과를 거뒀다. 해병대 2대대는 12월 14일, 5대대는 12월 15일 각각 연포비행장으로 이동함으로써 함흥지역의 방어임무를 끝마치게 됐다.
원산철수작전은 최종 방어부대였던 해병대의 3대대가 12월 7일에, 1대대가 12월 9일에 각각 원산만을 떠남으로써 끝을 맺었고, 양 대대는 12월 12일 부산에 도착했다. 함흥지역에서는 해병대의 주력이 12월 15일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이후 12월 24일 미 3사단의 마지막 해안방어부대가 흥남 해안을 떠남으로써 109척의 수송 함선이 동원돼 10만5000명의 병력과 1만7500대의 차량, 35만 톤의 각종 전투 물자, 9만1000명의 피란민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그 막을 내렸다.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해병대사령부와 2·5대대는 12월 15일 수영(水營)비행장에 도착해 1·3대대와 합류한 후 12월 16일 항공편으로 다시 부산을 떠나 진해(鎭海)에 도착해 부대를 정비하고 교육과 훈련을 하면서 차후 작전에 대비했다. 해병대는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후 12월 15일 연포를 떠날 때까지 사살 715명, 부상 315명, 포로 18명 등의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중공군은 그들의 포위권 내에 들어 있는 미 10군단을 섬멸하고 38선 이남까지 진출, 전쟁을 조기에 끝맺고자 흥남 포위망을 직접 공격했으나, 오히려 유엔군의 성공적인 흥남철수작전으로 중공군의 대병력이 이 지역으로 흡수 및 견제당하는 역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유엔군은 더 이상 큰 혼란에 빠지지 않은 채 차후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됐고, 그 중심에는 한국 해병대가 있었다. <국방일보 허진녕 소령(진)·육군사관학교 전사학 전임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