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해병대 장병들
유엔과 공산 측은 6·25전쟁을 군사적인 승패보다 명예로운 휴전으로 마감하기로 한 정치적 결정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유엔 측은 휴전 당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으나, 공산 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1951년 8월 25일 휴전회담장을 떠나 버렸다.이에 유엔 측은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압력을 가해 공산 측을 회담장으로 복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선 유지에 필요한 고지와 지점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중동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미 10군단(Clovis E. Byers·소장)도 월산령 북방에 위치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서 양측에서 공격을 개시했으나, 피의 능선 전투 등에서 고전하자 작전을 확대해 군단 예비인 한국군 5사단은 서측방 가칠봉(1242고지)을, 한국군 8사단은 동쪽 소양강과 남강의 분수령(854고지)을 공격하도록 하고, 미 1해병사단은 펀치볼 북쪽의 고지군(924고지 : 일명 김일성 고지, 1026고지 : 일명 모택동 고지, 1056고지)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미 해병1사단에 배속된 한국 1해병연대(김동하 대령)는 우측의 미 7해병연대와 더불어 1951년 8월 31일 06시 공격을 개시, 피나는 공방전 끝에 9월 3일 김일성 고지(924고지)와 모택동 고지(1026고지)를 점령했다. 우측 미 7해병연대도 주어진 목표를 점령해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해안분지(펀치볼)를 확보했다.
이로부터 한국 1해병연대는 동쪽 김일성 고지와 서쪽 서희령(西希嶺)을 연하는 방어선에 3·1·2대대를 배치하고, 북한군 3군단 예하 1사단의 역습에 대비해 진지를 강화하면서 전방에 대한 강력한 수색작전을 수행했다.교동에서 월산령을 거쳐 능선을 따라 직접 공격작전을 수행하며 주어진 목표를 점령한 한국 1해병연대는 북방에 대한 수색정찰전뿐만 아니라 후방지역 경계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잔적(殘敵) 소탕작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연대는 1951년 9월 5일부터 전후방 수색작전을 실시해 분지 북방에 설정된 통제선(Hays선)을 방어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포격과 사격이 심해지자 9월 10일부터 14일까지는 미 1해병사단장(Gerald C. Thomas·소장)의 명령에 따라 강력한 수색작전을 수행해 새로운 목표를 탈취하고, 18일까지 새로운 방어선(신 Haystjs)을 확보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해병은 계속되는 북한군 1사단 3·14연대의 포격과 공격·습격을 받아 거의 매일 접전을 치렀다.
이때마다 때로는 참호 속에서, 때로는 후방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펼쳐 미 해병1사단의 좌익부대로서 펀치볼 북쪽의 요충지를 지켜냈다. 그리하여 1951년 9월 5일부터 18일까지 펀치볼 북쪽의 고지들을 확보하는 동안 한국 1해병연대는 사살 18명, 포로 22명 획득과 소총 3정, 따발총 2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6명의 전사와 15명의 부상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 1해병연대는 1952년 3월 17일, 육군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서해안 장단(長端)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이 지역을 지켜냈다.산악지역에서의 수색정찰전을 수행한 한국 1해병연대는 이러한 전투수행을 위해 명심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
여름의 삼림과 겨울의 설산(雪山)으로 시계(視界)에 제한을 받는 산악지역의 수색정찰전에서는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 “누가 먼저 사격을 하느냐”가 작전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라는 점. 다음으로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시계의 제한점을 역이용해 이쪽의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고 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사지(死地)를 탈출하는 과감한 선제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 이를 이용한 적의 기만전술을 조속히 간파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해질 무렵 적이 “해병대다. 사람 살려라” 하고 소리치면서 아군을 유인해 상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을 지휘해 수색정찰전을 수행할 경우에는 엄정한 사격 군기가 매우 중요하다.
이들 신병은 기도비닉이 필요한 수색정찰전에서 조그마한 이상 징후가 있어도 겁에 질려 우선 사격함으로써 적정 파악을 어렵게 함은 물론, 아군의 위치를 쉽게 노출시켜 작전수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 1해병연대가 남긴 이러한 교훈들은 수색정찰전을 수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오늘도 남아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국방일보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