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투혼…‘귀신잡는 해병’ 신화 창조
6·25전쟁에서 한국 해병의 역할은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병대는 이 외에도 다양한 상륙작전과 지상작전을 수행했는데, 지상작전 중에서 해병대의 위상을 드높인 전투가 바로 도솔산 전투다.도솔산 전투는 유엔군이 5월 말에 실시한 ‘파일드라이버’(Piledriver)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미 제1, 9군단이 와이오밍(Wyoming)선으로 진출하는 동안 미 제 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화천저수지~펀치볼(해안 분지) 남쪽~거진으로 연결되는 ‘신 캔사스(Kansas) 선’을 설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돼 있던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예비로 사단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솔산서 전사한 전우를 위해 충령비를 쓰고 있는 해병대 사진 해병대 제공
그러나 미 해병 사단의 진격이 순조롭지 못하자 사단 중앙의 미 제5해병연대 지역에 국군 제1해병연대를 투입해 대암산~도솔산 지역을 확보하고자 했다.미 해병사단의 명을 받은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6월 4일 오전 8시에 항공 및 포병 화력의 지원 아래 2개 대대 병진 공격을 실시했으나, 이 지역을 방어하던 북한군 제12사단이 험준한 산악 지형의 고지를 이용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주간 공격의 한계를 느끼고 6월 10일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하고 11일 02시에 조명과 화력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적인 해병대의 야간 공격은 대성공을 거두고 별다른 피해 없이 적의 주저항선을 돌파했고, 이후 전과 확대를 통해 대암산(1314m)까지 점령했다.
14일에 미 해병 1사단장은 대암산 북서쪽에 위치한 도솔산(1148m)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도솔산은 해안 분지를 감제하며 양구에서 해안분지를 거쳐 노전평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였다. 그러나 워낙 산세가 험해 공격하기 어려운 고지이기도 했다. 도솔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가 협소한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 연대장은 대대별로 단계별 작전을 실시하고자 했다.
최초 제2대대가 15일 공격을 개시해 도솔산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17일부터는 제3대대가 도솔산을 공격했다. 접근로가 협소하고 일기가 불순해 화력 지원의 효과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제3대대는 교통호를 구축하면서 적진지로 접근했다. 18일에 중간 목표를 점령한 제3대대는 그날 밤에 야간공격을 계획하고 2개 중대를 투입했다.
19일 영시를 기해 제11중대가 도솔산의 동쪽 사면을 따라 공격하고 03시 30에 제10중대가 도솔산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드디어 05시 30분에 도솔산 정상을 점령했고, 후속하던 제1대대가 도솔산 좌전방의 능선을 점령하면서 16일 간의 도솔산 지구 전투가 막을 내렸다.이 기간 동안에 국군 제1해병연대는 미 해병대가 고전하던 작전 지역을 인수해 대단히 성공적인 작전을 실시하고 임무를 완수했다.
작전 중에 총 24개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단계별로 점령하면서 작전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미군들이 꺼리던 야간작전도 과감히 실시하는 작전 능력도 보여줬다.그러나 작전지역이 방어하던 적에게 대단히 유리했기에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제1해병연대는 전사 123명, 부상 582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엔군은 펀치볼을 감제하는 도솔산과 대암산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차후의 공격작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신 캔사스 선’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동부전선의 산악지형 중에서도 유난히 험난한 도솔산 지구에서 한국 해병대가 투혼을 불사르며 보여준 군인 정신은 훗날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신화의 기틀이 됐다. <국방일보 박일송 중령·육군사관학교 전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