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잘 알려진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의 말이다. 6·25전쟁 전적지를 돌아보면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피아 간의 혈전이 벌어졌던 곳은 거의 예외 없이 전통시대의 전쟁사적지와 일치한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비추는 빛이라고 했나 보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사진)가 서 있는 행주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산성이 축성돼 있었다. 곧 행주산성이다.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침입하는 적 수군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적은 임진강·한강의 합류지점으로 천험의 요새인 오두산성, 즉 지금의 통일전망대가 세워진 곳에서 막고, 이어 행주산성에서 막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둔 행주대첩도, 한미 해병대의 행주도강 작전도 이런 까닭이 있었다.
1592년 4월 조선에 침입해 파죽지세로 북진했던 왜군은 명나라 원군과 조선 관군의 반격, 그리고 각지의 의병 봉기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추격하던 명나라 군대를 경기도 벽제관 전투에서 대파하고 곧이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행주산성에는 역전의 명장 권율 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행주산성을 함락해 조선 관군의 반격을 꺾고 한양 탈환을 저지하려던 왜군의 기세는 매우 거셌다. 하지만 권율 장군을 중심으로 관·민이 혼연일체가 돼 왜군의 파상 공격을 막아냈다. 화살이 떨어져 투석전이 벌어지자 부녀자들까지 나서 긴 치마를 짧게 잘라 입고 여기에다 돌을 날라 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래서 ‘행주치마’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9·15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던 한미 해병대는 9월 19일 한강 남단에 도착했다. 이제 한강을 건너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국내외에 역전의 기세를 떨치고 사기를 진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에 앞장섰던 미 해병1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 장병들이 행주도강 작전을 벌였다.
9월 20일 미명에 행주나루 건너편 개화산 기슭 한강변에서 도하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혈전 끝에 한미 해병대는 도강작전에 성공함으로써 9월 28일 서울을 탈환, 수복하는 데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이날의 전공을 기리는 한미 해병대의 행주도강 전첩비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산 7-1번지에 서 있다. 행주산성 서북쪽 산록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겨울 햇살에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삼각형 모양의 두 개의 비로 구성된 이 비는 한미 해병대의 연합작전을 의미한다고 하니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자 영원한 전우인가 보다. <국방부 김용달 박사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