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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누비며 2번 관통상..무공훈장 5개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다

PYH2010053100660005600_P2.jpg(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나라 없는 국민이 있습니까? 나라를 지켜야 자기가 국민이 되는 겁니다. 죽었든 살았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40일 만인 1950년 8월 5일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5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강용성(81.제주시 외도동)씨는 병역의무를 꺼리는 사람들을 향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그 나라 국민이 아니다"고 일침을 놓았다.

◇인천상륙ㆍ수도탈환 전투 참가 = 같은 마을 선.후배 15명과 함께 입대해 제주에서 훈련을 받은 강씨는 9월 1일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일주일 가량 훈련을 더 받은 그는 같은 달 12일 미군 군함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속한 한국 해병 1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함께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인천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해병 1연대는 1대대, 2대대, 3대대, 5대대 등 4개 대대로 구성됐으며, 부대원은 대부분 제주 출신 해병 3∼4기생이었다. 그는 당시 3대대 10중대 3소대 1분대에 속했다. 인천항에 집결한 그의 부대는 두 번이나 시가전에 출동했다.

그는 이어 벌어진 부평전투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다니던 인민군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가 속한 3대대는 계속해서 수륙양용전차를 타고 한강을 넘어 지금의 서울시 수색동 쪽으로 들어가 서울 도심 외곽의 산에서 다른 대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외곽 방어를 담당했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 전투가 끝나자 인천항에서 군함을 타고 한반도의 반 이상을 돌아 평안남도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의 부대는 육로로 황해도 동양지구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되자 다시 원산항을 거쳐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 퇴각하는 아군을 지원했다.

◇중공군 인해전술로 첫 부상 = 1951년 늦은 봄 새벽 4시께 강원도 화천지구의 한 능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적의 포탄이 중대본부에 명중되자 능선을 넘어서 방어하라는 중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낮은 포복으로 이동하던 강씨는 갑자기 오른쪽 팔뚝을 쇠몽둥이로 때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잠시 혼절했다. 흔들어 깨우는 동료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강씨는 재빨리 손에서 떨어졌던 M1 소총을 잡고 검은 물체를 향해 발사했다. 어느새 능선까지 올라와 중대장을 겨누려던 중공군 1명이 쓰러졌다.

사방은 아수라장이었다.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고, 중공군들이 던지는 방망이 수류탄이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꽝꽝' 터지며 불꽃을 뿜었다.

강씨가 속한 중대는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중공군을 상대로 힘겹게 버텼으나 인해전술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중대장의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골짜기 쪽으로 30여m를 달린 그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마침 능선에 올라서서 아군을 향해 따발총을 갈기는 중공군 2명을 쏘아 쓰러뜨렸다.

중공군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골짜기로 달려 내려온 그는 동료와 선임장교를 보고 비로소 안심했다. 하지만 오른쪽 팔뚝이 싸늘해지며 통증을 느껴 살펴보니 옷이 시커멓게 피로 물들었고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관통상을 입은 줄도 몰랐던 것이다.

강씨는 "수류탄 투척 병들이 어둠 속에서 몰래 능선 가까이 올라와 있다가 꽹과리 소리가 나면 잡아 던지는데 사방에서 꽝꽝거리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중공군 2명 생포..오직 전진뿐 = 홍천지구에서 행군하던 그의 부대는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 너머에 수상한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누구의 명령도 없었지만, 강씨는 혼자 개울을 건너 낮은 포복으로 10m 앞까지 바싹 다가갔다.

집안을 주의 깊게 살피던 그는 인기척을 직감하고는 큰 소리로 손을 들고 나오라고 외쳤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집을 향해 총을 한발 발사하고 다시 소리쳤다. 그제야 질겁한 중공군 2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한번은 홍천지구의 방어진지에 주둔하며 정찰임무를 수행할 때 전방에 적군이 개미떼처럼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포병의 사격지원과 공군의 포격지원을 요청해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의 부대는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참을 달렸는데 뒤가 허전해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포격이 시작되자 적군을 향해 돌격했는데 아군의 포탄이 앞에서 떨어졌다. 뒤돌아 보니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돌아와 보니 아군들은 뒤로 물러서 있었다"며 "그때는 젊어서 그랬는지 무서움을 모르고 무조건 앞만 보고 나갔다"고 말했다.

그 후 진군하다 보니 적군이 있던 곳은 완전히 초토화돼 있었고, 곳곳에 사람과 말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나뭇가지에는 사람의 창자가 걸려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그는 전쟁의 참상을 전했다.

◇도솔산 전투서 두번째 부상 = 1951년 6월 미 해병 5연대가 실패해 물러난 양구지구 도솔산 전투에 한국 해병 1연대가 투입됐다.

강씨가 속한 10중대는 제일 먼저 도솔산 24목표 중 6목표를 공격하기 위해 저녁에 출동했다. 그러나 거대한 암벽 위에서 진을 치고 수류탄과 총을 마구 쏘아대는 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사상자만 발생했다. 그와 분대장을 제외한 소대원 전원이 부상했다. 그와 분대장은 곧바로 각각 다른 소대로 배치됐다.

보급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부대는 다음날 아침 수통 받침으로 반쯤 지급된 식량을 먹고는 13목표 정상을 향해 다시 진격했다. 정신없이 공격하던 그의 바로 앞에서 두발의 포탄이 연이어 터졌다. 순간 눈앞으로 까만 물체가 다가오는 것 같더니 왼팔이 '획'하게 뒤로 돌아갔다.

포탄 파편이 왼쪽 손목을 관통한 것이다. '악!'하는 단발 비명과 함께 그는 쓰러졌고, 전투가 끝나고서 전방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진해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의 왼손은 지금도 종잇장 한 장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다.

2천여명의 제주출신 해병이 주축이 돼 피를 흘리며 싸운 결과 한국군은 양구지구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제주 해병 133명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강씨는 이등수병(현재의 일병)으로 참전해 1952년 12월 해병3조(〃하사)로 명예제대(의병제대.依病除隊) 할 때까지 충무무공훈장 2개와 화랑무공훈장 3개를 받았다.

khc@yna.co.kr  < 영상취재 : 홍종훈 (제주취재본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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