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해병대는 해군 군가를 불렀다.
태생이 해군에서 갈라져 나온 사촌간이라고는 하지만 해군 군가를 부를 때마다 “이건 아닌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중대 2소대장 강복구 중사도 그런 사람이었다.
훗날 장교가 돼 대령까지 올라간 강중사는 소대원 가운데 신병교육대 1기 출신 신영철 병사를 주목했다.
사회에서 무대 극본을 쓴 실력이라면 해병대 노랫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야, 신영철 이리 와. 너 해병대 노래 한번 만들어 봐!”
해병대만의 군가 보급 필요
강중사는 어느 날 신병사를 불러 해병대 노래 가사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신병사는 입대 전 서울 장미악극단에서 공연하는 악극의 대본을 쓴 경력의 소유자였다. 영화사 조감독 경력도 가진 사람이었다.
(1절)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2절)창파를 헤치며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맹호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 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 혼
(후렴)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가사가 완성되자 강중사는 지휘계통을 통해 사령부에 제출하면서 해병대 군가 제정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때마침 지휘부에서도 해병대 군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건의는 즉각 수용됐다.
김성은 참모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가제정위원회가 구성됐다. 가사를 널리 공모하기로 결정됐다. 신병사의 작품은 응모작의 하나로 취급됐다.
평이한 가사·씩씩한 행진곡 풍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3절을 추가하고 약간 수정을 가하는 심의과정을 통해 가사가 탄생했다.
이제 곡을 붙일 차례였다. 작사자 신병사의 건의에 따라 경찰청 악대를 이끌고 있던 김형래 씨에게 의뢰하기로 결정됐다.
영화배우 김진규 씨의 삼촌인 그는 장미악극단 단장 출신이었다.
악극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수도경찰청 악대로 옮겨간 지 얼마 안 됐다. 그래서 신병사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이 노래가 제작돼 보급할 때 노래 부르기를 지도한 이병걸 상사 작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성은 장군 등 군가 제작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내부에서 작곡 문제를 해결했다면 쟁쟁한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초급 지휘관에게 맡겼겠는가.
당시 해군에는 동경음악학교 출신의 남궁요열(해군군악학교장), 통제부 군악대장 한상기 씨 같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맡기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외부 음악가에게 의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따른 것이다.이 노래는 가사가 평이하고, 곡은 씩씩한 행진곡 풍이어서 쉽게 보급됐다.
이제 내 노래가 생겼다는 소유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더 힘차게 부르기 경쟁을 벌이다 인후가 파열돼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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